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하 Sep 07. 2018

다녀오겠습니다 [2018버닝맨편] #4-6 마지막날

코리안 백수 청년의 무모한 버닝맨 탐방기

20180902

-

-

-



08:00AM
슈퍼맨과 마지막으로.

7시에 알람을 맞춰놓고선 한 시간 늦잠을 잤다. 버스를 놓칠세라 정신없이 텐트를 접고 아침을 먹고는 캠프를 나선다. 인사는 어제 이미 다 해서 제일 많이 정들었던 랩터랑 메이랑 수퍼맨이랑만 다시 한 번 꼭 껴안고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다행히도 갈 때는 올 때보다 한 결 가벼운 몸과 마음. 짐이 반쯤은 줄어든 것 같다.



09:00AM
드디어 셔틀버스가 온다!

셔틀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운 좋게도 셔틀버스가 보인다. 30분정도를 돌아돌아 버스디포를 향해 가는데 승객이 나랑 두 명 더 있는 게 전부다. 체크인을 하고 익스프레스버스에 탔는데 하필 내가 그 버스의 마지막 승객이었다. 남아있는 자리는 역시 화장실 옆자리. 리노행 버스는 샌프랑행에 비해 턱없이 더럽고 지저분하고 충전포트도 없고 에어콘도 부실해서 진짜 돈이 아까웠지만 역시 어마어마하게 긴 대기줄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샤론 말에 의하면 작년 일요일 아침 10시에 RV를 타고 버닝맨을 나섰는데 리노까지만 장장 10시간이 걸렸단다. 익스프레스 버스는 정말 신의 한수였다.



01:00PM
리노공항에 있던 버닝맨 사진집.
리노공항에서 팔던 버닝맨 클래식 버거.

나는 다행히도 중간에 한시간정도 차가 막힌 걸 빼고는 2시간 만에 리노 공항에 도착했다. 버스는 너무 불편했지만 3시간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리노 공항은 소규모 공항이었는데 곳곳에 거대한 쓰레기통이 놓여 있고 버너들은 대형 쓰레기를 여기에다 버리라고 적혀있다. 공항은 버너들로 인산인해였다. 처음에는 깨끗해 보였던 공항인데 몇 시간 지나서 버너들의 모래먼지와 쓰레기를 감당하지 못해 개판이 되었다. 나도 거기에 어느 정도 보탬을 한 것 같다. 머리감고 몸과 가방을 닦고 안에 있는 물건들까지 하나하나 씻으니 2시간정도가 걸렸다.



03:00PM
리노공항 한구석에는 소규모 버닝맨 전시회까지 열렸다.

몇 번을 씻었는데도 다리가 도로 모래범벅이 된다. 몸 어딘가 모래구멍이 난 모양이다. 공항 체크인을 시도했는데 24시간 공항이 아니라서 내일 오전 4시 이후로 체크인을 하란다. 후 그럼 리셉션에서 자야한단 말인가...



04:00PM
아나가 줬던 버닝맨조형물이 타고 남은 재.

공항 바닥에 앉아서 6일동안 쓴 글과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데 같은 캠프 맴버라 친하게 지냈던 아나를 다시 만났다. 12시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한다. 10시 비행기라서 같이 저녁먹고 버닝맨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우리 둘다 똑같이 영화 속에 있다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쯤이면 사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중일테니 진짜 서로의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경험이 된 셈이다. 아나는 아침 일찍 어제 불탄 버닝맨조형물에 가서 숯더미를 챙겨왔다고 했다. 거기는 그 숯으로 바베큐를 해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일종의 전통이라고 한다. 우리말고도 리노공항에는 버너들로 가득하다. 저마다 상대와 버닝맨 경험을 공유하기 바쁘다. 그들의 표정이 마치 긴 꿈을 꾸고 온 것 같다. 그 꿈을 통해 얻은 영감들과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까지 괜히 흐뭇하다.



11:30PM
불쌍한 내 발바닥.

발에 완전 가뭄이 일었다. 아나가 주고간 발전용크림을 발랐는데도 모래 먼지의 여파가 크기는 크다. 슬슬 공항노숙 준비를 해야겠다. 리노공항은 노숙에 적합한 공항은 아닌것 같은데 그래도 나말고 벌써 잠든 사람들도 많다. 슬리핑백은 이미 버렸고 패딩만 입고 자야겠다. 버닝맨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 기분. 끝난게 끝난게 아니다.



11:59PM

예상대로 먼지 가득했고, 히피스럽고, 영적이고, 방탕하며 섹슈얼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배울 점도 많았던 시간이다. 나누고 표현하고, 소통하고 꿈꾸는 것. 도시는 잊고 지내던 가치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던 소중한 공간이다.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더 자유롭고 따듯하고 도전적인 사람이 되게끔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한편 많은 부분에서 축제화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있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버너들이 50프로 있다면 그냥 축제를 방관하고 즐기기 위해 찾은 (나같은) 이방인들도 50프로 정도 있었다. 그치만 여전히 그 나눔과 화합, 사랑의 정신만은 여전히 풍족했다.



00:00AM

캠프사람들도 너무 좋았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나눔의 의미를 많이 배웠다. 난생 처음 헤나 아티스트가 되었던 경험도 잊을 수가 없다. 소중한 기억들을 너무 많이 얻어간다. 랩터의 숨은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버닝맨에 있는 동안 나는 되게 의미 있는 이름을 가졌던 것 같다. 힘들 때도 짜증날 때도 내 이름을 묻는 사람에게 나는 언제나 아임 해피라고 대답해야 했기 때문. 역설적이라고 생각될 때도 많았지만 어쨋든 나는 해피였다. 사실 기대만큼 아쉬움도 많았는데 살면서 한번쯤은 다른 입장에서 버닝맨을 다시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좀 더 전파하고 축제와 교감하는 그런 진정한 참가자의 입장에서!



-

-

-

아나와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녀는 버닝맨이 참가자에 따라 매우 유동적인 의미를 갖는 축제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한 가지 특정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은 각기 다른 의미로 사람들에게 가닿는다.

어떤 준비를 하느냐 어떤 생각을 품어가고 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낳는 곳, 버닝맨.

그러니 혹시 버닝맨을 준비하는 또다른 사람이 있다면 나의 경험은 그냥 나의 경험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생각과는 또 다른 당신만의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전 12화 다녀오겠습니다 [2018버닝맨편] #4-5 다섯째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