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바라던 세상은 요원하고

코스타리카 로마스 알리오 W

by 만델링

환한 모래언덕에 까만 옷 입은 사람 수백 명이 개미같이 관을 들고 걸어가던 것이 생각난다이. 느이 형들이 입술을 꽉 물고서 울고 섰던 것도 아슴아슴 떠오른다이. 느이 아버지 생전에 나한테 하던 말이, 그때 내가 울지도 않고 뗏장 옆에 풀을 한 움큼 뜯어서 씹었다든디. 근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야. 묘지로 가기 전 일들만 또렷해야.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네 살이 그리 희었던 줄 그때 처음 알았다이.


한강, 소년이 온다. 181쪽. 새끼를 놓친 어미가 남은 시간을 살아내는 일은 자신의 몸을 샅샅이 내치는 일보다 어려울 것이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은 변치 않을 것이며, 어미는 죽어서도 울음을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잿더미가 된 가슴을 안고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은 은폐되고 조작된 사건 앞에서 진실을 찾는 시간에 닿기만을 바랄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말할 수 있을 때 어미는 흰 얼굴로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낮고 깊게 토하는 정태춘의 노래는 오월이면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그 꽃들이 베어진 날에 하늘의 별들은 유독 빛나고 밝았다 한다. 봄과 여름의 딱 중간, 마음을 간질이는 봄바람과 이른 열감에 달뜨다가도 우리들의 오월은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월의 푸름은 썩 달갑지 않다.


오늘의 커피는 코스타리카 로마스 알리스. 향이 상쾌하고 좋다. 가벼운 청량감이 산들바람처럼 부드럽다. 애도용 커피로 어울릴지 모르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1월 23일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는다. 굴곡진 현대사 한복판에 섰던 분의 사망 소식으로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던 민주주의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린다. 추상적인 개념이라 여기는 것을 소설을 통해 현실로 직감한다. 무고한 사람들의 무수한 죽음을 말하듯 이야기하듯 쓴 소설을 읽노라면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돼버린다. 공부하기 싫어 데모하던 젊었던 그때는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며 민주화를 역사의 발전이라 여기며 민주 발전을 염원했다. 학점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염원은 반비례한다 한다 여기며 팔을 흔들며 다녔다. 이후 긴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이 그리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바라던 세상이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중일뿐.


새끼 잃은 어미가 피를 토하는 고통을 껴안고 비죽한 잡목을 헤치고 바위 밑동에 엉덩이를 대고 커피를 마신다. 하얀 안개꽃 향이 나는 커피다. 깃발 없는 진압군, 탱크들의 행진 소리, 옥상 위의 기관총 소리가 쓰고 깊은 커피 향에 잠시 잠긴다.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 뉘인 소년들이 그들의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우는 어미를 위로하는 커피다. 부드럽고 쓸쓸한 쓴맛이 어미에게 얕은 빛이 되길 바라는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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