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내일부터 힘차고 우아하게

엘살바도르 엘바바로 SHG 워시드

by 만델링

처음엔 맛이 좀... 하다가 자주 먹고 익숙해지면 정말 맛있다 하는 음식처럼 사람도 그런 부류가 있다. 첫인상 별로라 여겼는데 만날수록 어머, 이런 면이 있었네! 그래,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정말 못하는 건 뭐야? 아이참,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 그런 사람을 만나는 중이다. 남자였다면 연애하고 은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즐겁고 유쾌하며 예쁘다.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단단한 마음도 있다. 그래서 지금 활짝 핀 커다란 꽃송이 마냥 빛난다. 형광등도 갈 줄 알고 세면대도 스스로 교체할 줄 안다. 개수대 수도꼭지 교체는 일도 아니다. 집 안에 필요한 모든 설비는 직접 고치고 바꿀 수 있는 능력자다. 은빛으로 빛나는 수도꼭지를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흘리는 완벽한 여자다. 가정 경제의 풍요로움, 가정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직 그녀의 노력과 손끝에서 나왔음을 우리는 안다. 그런 그녀가 요즘 시들하다. 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고 심지어 잠도 안 온다 하니 참 걱정이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고민한다. 부모의 유산이 풍족하여 평생 노력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삶을 꿈꾸는 우리들, 이번 생은 실망이다. 그저 많이 아프지 말고 지금처럼 티키타카(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 쿵짝이 잘 맞는 관계, 죽이 척척 맞고 합이 잘 맞는 관계)하며 지내는 걸로 만족하자.


오늘의 커피는 엘살바도르 엘바바로 SHG. 빈 사이즈가 큼지막하다. 열매가 크니 과육이 많다. 과육이 많아 풍부한 향미를 느끼게 한다. 을 본질을 제대로 아는 반듯한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부족한 면이 없다는 뜻이다. 크랜베리의 새콤한 맛, 복숭아나 배 같은 과일의 달고 시원한 맛, 고소한 에이스 비스킷, 청사과의 스윗함, 부드러운 바디감까지 가진 완벽한 커피다. 마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새어들고, 멋을 낸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는 분위가 보이는 커피다. 맘 편한 사람끼리 모여 떠드는 수다를 연상하게 하는 맛이다. 편안하고 한가로운 저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은 늦은 밤의 휴식이다. 하루치의 할 일이 끝났고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주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갱년기가 시작된 중년의 우린 뭘 이렇게 죄다 껴안고 살았을까, 버리지 못하고 다 쌓아두기만 했던 걸까, 다시 오지 않는 것은 뭘까,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며 커피를 마신다. 앞으로 우리는 사교적이며 적극적으로 지내기로 하자. 못 다한 것이 남았다면 지금이라도 서둘러하고 때를 놓친 일은 그냥 지워버리고 머뭇거리지 않고 달콤하고 편안하게 지내도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너무 오만한가? 물론 우리를 에워싼 세상은 복잡하고 하루하루의 고단한 삶은 여전해서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떠밀려 살겠지만 그래도 서로 믿고 포기하지 않고 이 어렵고 짝이 없는 세상에서 늠름하고 우아하게 우리 방식대로 살아가자는 말을 커피잔을 들고 경건하게 한다. 음, 딱 마시기 좋은 타임이군. 향이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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