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만 나면 번번이 원두를 검색하는 나는 낯선 원두를 보면 바로 결제를 한다. 구매해보고 싶다는 생각, 장바구니 담기를 건너뛰고 바로 구매에 돌입한다. 결제를 했을 뿐인데 그 순간 빵과 커피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냄새가 난다. 인터넷으로 최초로 구입한 원두는 인도 몬순 말라바 AA 였다. 커피는 달고 배부른 믹스가 최고라 여기며 자판기 커피를 좋아하던 때였다. 커피 산지, 재배 환경, 환경에 따른 특징 등은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풀네임에 든 계절풍을 뜻하는 '몬순'이라는 단어가 좋아서 구입했다. 그냥 좋아서 구입한그 원두는 하도 쓰고 깻묵 맛이 나서 다음에는 절대 사지 말아야지 했다. 이후로 여러 나라의 원두를 사면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맛과 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꽃향과 열대 과일의 스파이시한 산미가 강한 커피보다 곡류의 단맛과 단순한 고소함, 늦여름 저녁 무렵의 한가함이 있는 원두를 즐겨 찾았다. 광클릭으로 새로운 원두를 살 때는 나만을 위한 귀한 사치품을 산 것 같은 마음에 웃음이 배어나고 원두를 기다리는 동안 이상한 기쁨이 차올랐다. 분명 이상하게 들릴 테지만 곧 내게로 올 그 원두가 궁금해서 설레고 조바심이 인 건 사실이다. 무슨 색인지, 콩알 크기는 어느 정돈지, 처음 맡는 향은 어떨지, 갈릴 때 단단한 정도는 어느 만큼인지, 물을 붓고 내렸을 때 가장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맛은 무엇일지 생각하면 마냥 기분이 좋아져서 커피에 대한 책도 읽었다. 그렇게 커피랑 친하게 지내다 보니 친구들과 카페에서 만날 때면 각자에게 어울릴 법한 커피를 권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달콤한 마음이 부푼다.
오늘의 커피는 엘살바도르 밀레이디 #3. 워시드 가공의 약배전 커피를 내린다. 위상에 걸맞게 향기가 그윽하다. 자두와 오렌지가 내는 새콤달콤함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묵직하고 산뜻하다. 모두가 떠난 해질녘에 그림자와 마주 선 자신을 보며 즐겁게 웃는 모습이 그려진다. 인생에서 쌓아 올린 것도 없고 한 가지라도 깊이 있게 할 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인생이 별 볼 일 없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된 사람이 갖는 여유는 성수기가 끝난 휴가지처럼 평온하면서도 변변찮게 보인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곤두박질치는 마음과 즐거운 마음 사이를 오가는 매일매일을 어떻게든 잘 보내고 있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아무렴 모든 건 다 괜찮다, 개의치 말라는 말을 하는 커피다. 무기력한 마음 앞에서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고통이라 여겼던 것이 별것 아닌 걸,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온기를 전하는 따뜻한 맛에 스스로 날 선 마음을 거둔다. 물론 거짓이다. 그래도 마음은 서늘해지며 분노와 억울함은 줄어든다. 오늘의 커피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내려놓고 이제 그만 자자, 그리 말하며 달래는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