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부츠 신고 털목도리 둘둘 말아 두르고 뒤뚱뒤뚱 가벼운 두 발 새의 깃털이 든 옷을 입고 집을 떠나야 할 것 같다. 부르는 이 없고 갈 데 없는데 집을 나서야만 될 것 같은 마음이다. 몸살 기운으로 뼛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다. 코가 빨갛게 됐다. 손가락은 뻣뻣하다. 어깨를 둥그렇게 웅크리고 종종 걸어서 시장이라도 갈 요량으로 나선다. 깃털이든 옷이 찬바람을 만나니 빵빵해진다. 후다닥 홀짝 뜨거운 커피 한 잔 했더니 속은 뜨끈뜨끈하다. 시끄럽고 재미있고 활기차고 북적이는 시장통에 서서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몹시 좋다. 몸이 녹는다. 새침한 마음도 몽글몽글 해진다. 추위를 녹이는 찜통의 하얀 김과 부글부글 끓는 선짓국 소리가 집에만 있는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의 단단함 없이 눙쳐진 마음을 밀어낸다.난장판이 된 마음이 서서히 아문다. 기를 쓰고 기대하던 것들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은 한 해다. 또 후회만 쌓인다. 그래도 누구 하나 몸은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하자. 일단은 그냥 해보자. 그래, 망각이 약이다.
오늘의 커피는 파나마 호세 게이샤. 파나마는 콜롬비아와 코스타리카 사이에 위치한 천해의 커피 재배지다. 풍부한 일조량, 1500m 이상의 해발 고도, 미네랄이 함유된 화산토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생산한다.일본과 하나의 연관성도 없는 게이샤다. 에티오피아 겟챠(gecha) 지역에서 나온 커피 품종이다. 게이샤(geisha)는 영어식 표기일 뿐.
호세 게이샤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와 같은 게이샤는 아니다. 재배된 농장이 다르다. 참, 가격 또한 같지 않다. 에스메랄다, 아주 고가다. 200g단위로 64000원쯤 한다. 내가 가진 게이샤는 테라로사에서 구입한 250g 한 봉지38000원이다. 부족한 미각으로 에스메랄다가 최상의 커피라는 찬사에 동의할 수 없지만 최고의 미각을 가진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정한 '신의 커피'라고 하니 그냥 그리 알아듣는다.
호세 게이샤는 부드러워 마시기 편한 커피다. 귀부인처럼 차려입었으나 앳된 모습이 남은 소녀 같은 바디감, 꽃 같은 향기가 넘친다. 즐겨 마시기엔 화려한 느낌이다. 맛과 향이 풍성하다. 팡파르 올리는 에버랜드에서 가장행렬을 구경하며 마시면 좋겠다. 멋진 커피지만 매일매일 마셨다가는 가세가 기울 것이다. 경제력 없는 사람인 게 참 아쉽다. 따스한 온기가 살포시 감싸는 느낌과 환하고 달콤한 맛에 겨울 아침 해장 커피로 추천하고 싶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고 남은 달력 한 장이 아쉬워 뭔가 새로운 일을 찾고 싶은 마음에 몸이 분주할 때 마시자.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게 도와준다. 진지하게 가는 해를 마무리할 때 마시자. 해를 거듭할수록 인연에 대해 곱씹게 된다. 세상 하직할 날 기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싶기도! 얼굴을 마주 보고 턱을 괴고 앉아 올해의 인연을 이야기해보자. 좋았던 사람과 얼른 지우고 싶은 사람을 나눠보자. 참 허망하다. 낡고 울불 불퉁한 마음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해가 되길 덕담을 건넨다. 새해에는 괜찮아, 잘될 거야 이런 말 하지 않아도 잘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