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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Feb 10. 2022

133 몰랐지, 오늘은 구천칠십칠일이야

카페 멜로 - 과테말라 인 헤르또 핸드드립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 남기게 돼 있다. 그러나 그 국물이 면에 스며들어 맛을 결정한다. 국물의 맛은 면에 스며들어야 하고, 면의 밀가루 맛은 국물 속으로 배어 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고난도 기술이다. 센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라면을 끓이며 - 김훈, 29쪽. 김훈 작가는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글로 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다. 그의 글은 노동으로 먹고사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 대놓고 노동하지 않는 삶을 비난하지 않지만 부끄러움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한다. 글을 읽는 동안은  성실한 나도 게으르고 부끄럽다. 름 노력하고 부지런한 타입이라 자부하지만 기가 죽는다. 작가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공복을 메우는 끼니로 다면 나는 별식으로 라면을 즐겁게 먹었고 지금도 자주 먹는다. 간단히,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게 하는 음식으로서 라면은 최상의 한 끼 식사라 여긴다. 이것은 혼밥을 즐기는 이들에게 내린 선물이 아닐까 싶다. 라면을 라면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달리 뭐라고 부를까. 어쩜 이렇게 딱 맞는 이름이 붙었는지 그 어원은 고사하고 유래도 모른다. 하지만 라면은 정말 라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린다. 라면, 라아- 하고 부르면 '라' 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혀를 위로 말아 올리 리을 모양처럼 꼬불꼬불한 면 모양이 '라면'하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안성탕면 하나를 끓일 때 물을 설명서보다 반 컵 더 넉넉하게 한다. 청양고추와 대파는 기본이다. 달걀 하나 툭 던져 넣으면 진하고 따뜻한 국물이 있는 라면이 된다. 얼굴보다 큰 대접을 식탁 위에 놓을 때 작은 웃음이 피는 음식이 된다. 예전보다 풍족해진 삶을 누리는데도 감정과 여유에서 궁핍함을 느끼는 내게 라면은 일상의 그늘을 걷어내는 한 끼의 식사다. 김훈의 표현으로 치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와 노동의 소중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음식이다. 라면에 대한 작가의 마음은 까끌까끌 함이다. 얼음 알갱이가 씹히는 포도맛 아이스바를 깨물어 먹고 나면 혀가 검게 물들달콤하고 아련해진다. 그리고 가슴 한쪽에 보랏빛 멍 안긴다. 인이 박인다. 라면은 인이 박인 음식이다.


 작가는 라면에 대해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고 쓴다. 물과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겉도는 내 마음에 위안을 주는 말이다. 흘깃하는 순간 겨울도 끝이 보인다. 콧속이 꽉 막히고 눈이 간질간질한 알레르기도 사라지고 있다. 카페 멜로의 커피 향은 시시각각 깊어지고 주인장의 숙련된 손놀림은 나무를 깎는 노인처럼 숙연하다. 곧 목련나무에 하얀 꽃이 함박할 것이다. 봄감기, 봄살을 앓는 시간이다. 익숙함이 던져주는 무료함을 피기 시작하는 꽃이 달랠 것이다. 커피물이 끓는 순간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윽하고 쌉쌀한 향을 따라 그리운 과거로 숨는다. 잘 나가던 한 때를 떠올린다. 그때는 참 매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지금은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었나 싶다. 다시 우쭐해져야지 하는 충동이 일렁거린다. 과테말라 인 헤르또,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꾼다. 가볍고 진한 쌉쌀함과 목이 싸해지는 쓸쓸함이 사뿐한 향으로 남는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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