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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Feb 23. 2022

142 사는 게 무겁더라도

쿠바 엑스트라 라시에라 마에스테라

영혜는 반듯이 누워 있다. 눈길은 창밖을 향해 던져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얼굴과 목과 어깨, 팔과 다리에 조금도 살이 남아 있지 않은, 흡사 재해지역의 기아 난민 같은 모습이다. 뺨이며 팔뚝에 긴 솜털이 자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치 아기들의 몸에 자라는 것 같은 솜털이다. 오랜 굶주림으로 호르몬의 균형이 깨진 탓이라고 의사는 설명했었다.


 채식주의자 - 한강, 183쪽. 따로 쓴 세 편의 중편소설을 모았다. 한강 작가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설로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인용된 문장은 <나무 불꽃> 편에 나온다. 언니가 병원 침대에 누운 주인공 영혜를 보고 있는 장면이다. 차츰 죽음으로 가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다. 죽음, 삶의 일부이고 인간의 숙명이지만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고민의 대상이다. 영혜가 죽음으로 가는 시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벌건 육개장 같은 느낌이다. 산다는 건 죽은 사람을 뉘인 관 앞에서도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소리 내어 울기까지 하는 이상한 일이란 걸 게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생을 이어가야만 하니 옹색한 희망에 간당간당 매달려 목구멍에 음식을 들다.


 살아가는 일은, 원두를 갈아서 톡톡 털어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졸졸 붓고 기다렸다가 꾹 누르는 프렌치 프레스에서 커피를 추출하는 일처럼 쉽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이것처럼 어려운 도구도 없다. 원두의 종류, 로스팅 정도, 분쇄 정도, 물 온도, 추출 시간 등을 따지면 그 난해함에 좌절하게 된다. 가끔 프렌치 프레스로 향이 좋은 커피를 내리며 이 흔한 도구가 인생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 젊음을 빙자한 오만함, 순수한 정신과 정열, 신의와 성의로 뭉친 청춘의 열기만으로 일생을 채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모두 탄소 원자로만 이루어졌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에서 형성된 광물 중 가장 단단하고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고급 보석으로서 모두가 탐내는 보석의 황제가 되었다. 왜 같은 탄소 원자에서 나왔는데 다이아몬드만 33억 년 전 깊은 땅속에서 탄생한 최고의 보석이 되었을까. 다이아몬드는 탄소 원자 1개를 중심으로 다른 탄소 원자 4개가 정사면체 꼭짓점 구조를 이룬다. 흑연은 탄소 1개와 3개의 다른 탄소 원자가 평면으로 결합되었다. 둘의 다른 점은 단순한 원자의 연결 상태의 차이 말고는 없다. 어느 것은 반짝반짝 빛나고 다른 것은 새까맣기만 한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험악한 환경에서 가장 단단하고 빛나는 보석이 만들어지는 신비를 삶에 비유하면 삶을 이해하는 즐거움이 될까.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이 되어 바라는 삶을 살든 순서가 중요하진 않지만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건 중요한 것 같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만족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오늘의 커피는 쿠바 엑스트라 라시에라 마에스테라. 삶을 지그시 응시하는 어른 같은 커피다. 내면의 복잡함을 꾹 누르고 크고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엄마 같은 커피다. 주인공 영혜말고 그녀의 언니에게 주고 싶다. 한기 든 속을 데워줄 것이다. 향긋한 채소즙처럼 부드럽고 매끈한 커피다. 삼삼하고 가만가만한 느낌으로 마시는 커피다. 진득한 조청의 무근한 단맛이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불꽃이 일렁이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차분히 다루는 커피다. 머물러있기 좋은 방에서 슬픔을 누르며 마시는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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