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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Feb 25. 2022

143 상황이 안녕은 아니더라도

커피플라워 미인점 - 코스타리카 로마스 알 리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래서 눈여겨보지 않을 때, 나 혼자 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나는 기뻤다. 나는 그가 그 이름처럼 얼마나 환한 사람인지를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좋았다. 나는 이 세상 어떤 것도 갖고 싶지 않았고 오직 환의 환한 아름다움만을 내 것으로 갖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나는, 환이 왜 죽으려고 했는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환과 나 사이에 내 힘으로 뛰어넘지 못할 거대한 장벽이 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공선옥, 187쪽. 나는 꽃향기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해금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고운 청춘의 시절을 속절없이 떠돌다가 상처받고 헤매다 다치고 어려운 시절을 근근이 견디는 서러운 몸이다. 위로의 말 한마디는 필요하겠다. 스무 살 시기의 쓸쓸함과 간질거림의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도 달콤하다. 낭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낯섦을 즐기지 않고 편안한 것만 찾는 나이가 된 중년 여인도 스무 살 이야기는 언제나 즐겁다. 순진하고 소심하고 발랄했던 스무 살의 이야기는 달콤하고 가볍고 성실하고 심각했다고 기억된다.


 해금이에게 위로를 토핑으로 얹은 커피를 주고 싶다.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지만 무화과 맛이 나면 좋겠다. 무화과는 뭉근하고 농염한 맛의 과일이다. 부드럽고 향이 별나다. 무화과나무는 열매 속에서 꽃이 피어 겉으로는 꽃 피는 것을 볼 수 없는 나무다. 일명 꽃 시절이 없는 나무다. 무화과나무는 해금이 마냥 자신이 얼마나 어여쁜지도 모르는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주먹만 한 크기에 밥 알 같은 속살이 가득하다. 해금이의 깊은 속을 닮았다. 가볍고 달콤하고 새콤한 맛에 침이 고인다.


 오늘의 커피는 코스타리카 로마스 알 리오. 피칸의 고소한 향이 퍼진다. 반복되는 일상 맑고 시린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흐른다. 한결 나아진 주방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리 또 정리 중이다. 차츰 넓어지는 공간이 보이니 마음이 즐겁다. 소설 속 해금이는 현실을 버거워했으나 잘 견디었다. 댈 곳 없이 외로운데 치열하게 살았다. 중년 주부 같은 마음도 아니면서 참 대견하게 견디며 지냈다.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고 싶다. 여동생이라면 부족한 요리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입에 맞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였을 것이다.


 코스타리카 로마스 알 리오는 희미한 외등만 자울자울 깜박이고 차르륵 싸악 바람 지나는 소리만 가득한 희미해지는 겨울밤에 어울리는 커피다. 쌉쌀한 냄새가 나레몬 향기도 나른 나른 핀다. 정 많은 것이 최대 약점인 사람들과 오늘도 주거니 받거니 유쾌하게 찬바람을 머리에 이고 성실히 노력하며 보냈다. 하루 종일 이렇다 할 성과도 없는 일을 하며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이다. 빛나는 재능 하나 없다. 그냥 조용히 때로 시끌벅적하게 산다. 커피나 한잔하자고, 하는 말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들과 같이 마신다. 내일은 눈이 빨리 떠지고 마음이 급해지는 기분이 좋은 날이면 좋겠다. 빛나고 싶지만 단 한 번도 빛나지 않았던 그들과 아무 영향력도 없는 말을 하며 또 하루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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