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 처음에는 술 얘긴가 했다. 내가 아는 취함은 술에 방점이 찍힌다. 다른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술, 생각이 난다. 무슨 연상작용의 결과인지 설명은 못하겠다. 가지다, 지니다, 라는 취함이었다. 원제는 '하찮은 것들'이다. とるにたらないものもの.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대수롭지 않다 여기는 것들을 눈에 보이게 잘도 쓴 글이다. 믿기지 않지만 글이 색으로 보인다. 하양, 연두, 분홍, 노랑으로. 하찮지만 둘도 없는 것, 사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 일상의 유형무형 60가지에 대해 썼다. 귀엽고, 깜찍하고, 밝고, 따뜻하며 사랑스럽다. 60가지란 다음과 같은 아주 소소한 것들이다. 초록 신호, 고무줄, 레몬즙 짜개, 담배, 조그만 백, 애칭, 닭 꼬치구이, 멘소래담과 오로나인, 칵테일의 이름, 트라이앵글, 그릇장, 지도, 식전에 마시는 술과 식후에 마시는 술, 욕실, 룰라 매, 역, 노란색, 무당연유, 나이프, 케이크, 책받침, 클렌저, 스프링클러, 상처, 요구르트, 여행 가방, 운동화, 완두콩밥, 준비, 말린 잎 말린 꽃, 결혼식, '도다'라는 말, 소금, 핑크색, 문라이트 세레나데, 장화, 프렌치토스트, 연필과 샤프펜슬, 비누, 자장가, 삶은 계란, 건포도 맛, 아주머니의 스카프, 배스 타월과 배스로브, 경정, 좌우명 또는 좋아하는 말, 서재의 냄새, 빗자루와 총채, 오버, 설탕, 전화, 쥐치 껍질, 양화극장, 해가 길어진다는 것, 리본, 추리소설, 설거지용 스펀지, 폭소, 면세점, 괜찮다는 것. 짧은 글이라 읽기에 좋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은 커다란 사탕을 입에 물고 살살 굴리며 먹는 느낌이다. 게으른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책이다.
역시 에쿠니 가오리다. 대수롭지 않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게 한다. 새로운 눈으로 읽게 한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마음으로 천천히 내킬 때만 읽어도 좋은 책이다. 알맞게 따끈하고 부족하지 않게 칼칼한 맛을 낸다. 가오리의 글처럼 순한 글은 쉽게 쓸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이런 종류의 글은 그럭저럭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 뜻대로 써지지 않는 글을 물 흐르듯 순조롭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딱 알맞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대부분 작가들이 글은 고치고 또 고친다고 말했다. 노력의 산물이지 재능이 아니라 했다. 그들이 노력에 방점을 찍었기에 나는 일말의 희망을 건다. 생각만으로 글이 써지지 않지만 재미와 의미, 난이도가 있는 글을 쓸 수 있길 바란다. 간결, 명료, 자연, 사람, 주변에 생기는 일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하는 글이 목표다. 보잘것없고 시시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쓸 것이다. 느낌을 살려 삶의 결을 살려 또박또박 쓸 것이다. 소박하고 거칠어도 그 속에서 의미를 끌어낼 수 있게 연습할 것이다.
오늘의 커피는 카투아이 레드 허니. 허니라는 뜻에 커피의 성격이 들었다. 끈적한 점액질이 꿀처럼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한다. 허니 프로세스다. 레드 허니는 과육을 제거한 후 점액질의 절반 정도를 제거하고 건조한 정제법이다. 내과피가 검붉은 색을 띠어 레드라 한다. 삼겹살을 불판에 굽듯 생두를 수망에 볶는다. 불꽃에 직접 닿지 않게 15cm쯤 거리를 띄운다. 한 방향으로 수망을 돌리면서 볶는다. 타닥 소리가 난 후 찌익쩍 소리가 나면서 원두 표면이 평평해진다. 불을 끄고 급히 식힌다. 수망 로스팅 완성이다. 입안에서 달고 부드럽다. 목을 넘어갈 때는 개운하고 칼칼하다. 코로 촘촘하고 향기로운 향이 맡아진다. 벌꿀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중간볶음으로 단맛이 매력적인 커피다. 신맛과 치우치거나 넘치지 않는 쓴맛, 부드러우면서 알싸한 향이 좋다. 마시고 난 다음 청량감과 유쾌함이 길게 남는다. 커피 취향이 달라도 기분 좋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상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생이 살 만한 거라는 믿음을 줄 것이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걷자. 그때 손에 들고 마시는 바로 그 커피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인생의 달콤쌉싸레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