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커피로 할까? 잘 익은 메를로 포도로 만든 와인처럼 짙고 깊은 맛을 내는 케냐, 감귤과 베리의 산미가 뛰어난 탄자니아, 오래된 부르봉 품종의 나무에서 생산되는 단맛과 꽃향기의 커피 르완다 중에 골라야 한다. 친구가 있다면 각각 내려서 같이 마시면 좋을 텐데... 여기는 발가락이 편한 슬립온을 신고 무릎 나온 츄리닝을 입고 똥머리를 한 채 놀러 올 친구가 없다. 정말 맛있는 커피를 내려줄 수 있는데 말이다. 마음에 싸한 소슬바람이 분다. 오늘처럼 하늘이 사각사각 변하는 날에는 남미 커피보다 아프리카 커피가 어울린다. 남미 커피는 대체로 맛이 단조롭다. 파근파근하고 건조하고 중성적이며 심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밋밋한 편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녀들이 놀러 온다면 아프리카 커피를 내려서 같이 마셔야지. 손재주가 좋은 친구에게는 르완다 커피가 어울릴 것이다. 자잘한 향과 가늘고 깊은 쓴맛이 은근히 화려한 그녀에게 어울릴 것이다. 센스가 남다른 귀여운 여인이니까. 패션 감각이 남다른 여행전문가 J에게는 탄자니아를 주자. 이곳저곳의 풍경을 되새기며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마실 것이다. 높은 교육 수준과 세계 각지를 여행한 경험은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한다. 우리는 그녀의 상기된 표정과 웃음에 기뻐하며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나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무게를 잡으며 케냐를 마셔야겠다. 커피집 주인장이 낼 수 있는 갖은 포즈를 취하면서. 오늘은 이곳까지 올 수 없는 친구를 기다리며 케냐와 르완다를 블렌딩 한다. 혼자 상상하며 마시는 커피가 참 달고 편안하다. 조만간 그녀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먼 길을 달려온 나를 따뜻하게 맞이할 것이다.
오늘의 커피는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에 산뜻한 꽃향기가 좋다. 진하고 깔끔하며 군더더기가 없어 가볍고도 묵직한 느낌이다. 지치고 늘어진 심신을 위로하기에 이보다 좋은 커피가 어디 있을까 싶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우연이나 행운도 운명의 일부분이 아니겠는가. 밝고 환한 날에 함께 커피를 마시고 하루의 끝에서 술 한잔 할 친구가 없는 것은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커피는 향의 두께를 잴 수 있을 만큼 알싸하고 외면하기 힘든 우아한 감칠맛이 있다. 중독이 될 수밖에 없다. 케냐와 르완다의 블렌딩은 덩굴장미가 넘실거리는 놀이공원에서 어린이날 받는 선물처럼 간질간질하고 설레는 맛이다.비스듬한 햇살 아래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을 보며 음, 이런 맛은 처음이군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룰루랄라 행복한 들뜸이 생긴다. 지키지 못한 약속, 장대하게 세운 계획 따위 이루지 못했어도 상심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다. 되려 다짐은 작심삼일의 반복이고 적어도 삼세번은 하고 또한 다짐을 다시 하는 것이 제맛이라고 말하는 커피다.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허우적거려도 뭐 이만하면 괜찮지 해주는 커피다. 참 기특한 커피 아니겠는가. 이유 없이 기쁘고 즐거워도 괜찮다고 말하는 커피다.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 눈을 시리게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같이 마시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