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셨어. 나 이제 고아야. 매끄럽고 건조한 목소리로 멀리서 가라앉은 음성을 날렸다. 잠시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을 했다. 통화는 고작 몇 분이었는데 한없이 느리게 가는 시간을 느꼈다. 삼오를 끝내고 부음을 전했다. 나쁜 지지배, 그녀는 늘 그렇다. 기억이 맞다면 20101210, 물론 음력이다.
아쉬웠던 일이 생각난다. 서로 솔직하지 못해 풀지 못한 감정 문제도 남았다. 하지 못한 일도 있다. 해야 할 일인데 하지 않은 일도 있다. 커피를 내려 같이 마시는 일은 쉬운데도 하지 못했다. 직접 내린 커피 한 잔 대접하지 않은 것이 항상 걸린다. 일 때문에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도 가족에게 자신을 헌신했다. 경제적 절대 빈곤상에서도 두 딸아이를 해외 유학하게 해 직장인으로 만들었다. 그 속에서 정작 자신은 말라갔다. 하지만 이제는 물이 오르는 중이다. 숨도 제대로 쉰다. 다행이다. 멀리서 불구경하듯 보기만 했을 뿐 해준 게 없어 항상 미안하다. 진심이다.
어느새 우리는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었다. 근래에 즐겨 읽는 책, 새로 산 시집, 간장 게장이 맛있는 남도의 어느 식당 이야기는 슬며시 뒷전이 되었다. 자다가 종아리 근육 경련이 일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이는 자다가 생기는 다리 쥐는 근육 위축에 의한 하지 부실이라고 처방했다. 고로 무슨 운동이든 당장 꽤 괴로울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마운 말이지만 듣지 않은 걸로.
인이가 한 말 중 가장 아픈 말은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의지와 상관없이 온전히 독립했다는 말이다. 이면에 어떤 뜻이 있는지 모른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것이 독립이라면 홀로 서기는 좀 더뎌지는 것이 좋겠다. 누가 뭐래도 가진 능력과 인품에 상관없이 부모님의 존재는 든든한 산이며 방풍림임이 확실하니까.
오늘의 커피는 과테말라 까시 씨엘로. 새까맣다. 강배전 커피의 비주얼이다. 얼굴이 까매도 상쾌하고 새콤하다. 맑고 가볍다. 레몬 향과 스파이시한 청량감이 좋다. 사람의 복잡한 마음에 대해 깊이 몰입하지 말라고 한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좋아하는 인이에게 주고 싶다. 같이 마시면 기쁠 것이다. 예의 바르고 구김살 없고 제 일에 열중하는 그녀다. 내가 가장 충만한 시간은 언제인가 하는 물음에 답한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나쁜 지지배가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그려본다. 자기가 충만할 수 있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고집 있게 사는 그녀를 사랑한다. 일단 살아내자, 견디자, 그리고 나아가자. 그녀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 나다운 방법으로 애쓰며 앞으로 천천히 멀리 나아가는 법을 아는 그녀다. 고통을 직면하고 고달픔을 품고 조용히 부지런히 살아온 그녀에게 배운다. 역경이 와도 헤쳐갈 수 있다. 주관대로 살아도 삶에 기분 좋은 만족감은 얻을 수 있다고. 그녀가 선생이다. 소녀처럼 밝고 싱그러운 머리털을 가진 인에게 바란다. 남은 날도 지금처럼 시를 좋아하고 운동을 즐기길. 여태 그랬듯 허영 없이 품위가 돋보이게 지내길. 스스로에게 정답게 굴며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