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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테크니션 Jun 20. 2020

스님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선택의 길이 없을 때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될 대로 돼라 라는 약간은 부정적 의미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불교 용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판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중에서 참선으로 도를 닦거나 경전을 연구하는 스님을 말하고 사판은 속세에서 시주를 얻으러 다니거나 농사를 지어 절 살림을 맡는 스님을 말합니다. 

이판사판은 이 두 종류의 스님을 뜻하는 이판과 사판을 합쳐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그런데 왜 스님을 의미하는 말이 합쳐져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불교를 숭배하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억불숭유 정책을 표방한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였습니다. 승려에게는 종이나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을 담당시켰고 따라서 승려는 조선 시대에서는 최하 계층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조선시대에서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 되었고 그래서 이판이 되거나 사판이 되거나 모두 승려가 된다고 해서 이판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스님을 또 다른 형태로 분류하면 학승과 선승으로 구분합니다. 경전을 주로 연구하는 스님을 학승이라 하고 선방에서 참선을 주로 하는 스님을 선승이라고 합니다. 선승이 하는 참선이나 학승이 하는 경전 공부나 방법이 다를 뿐 모두 다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방법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스님과 수행을 많이 하는 스님 중 어떤 스님이 더 낫다고 단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수행을 많이 하는 선승이 경전을 공부하는 학승 보다 더 낫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300년 전 한 비구니 스님이 <열반경>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생겨 혜능대사를 찾아가 열반경을 내밀며 궁금한 것을 질문하자 혜능대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그러니 네가 경전을 읽어주면 내가 그 뜻을 알려주겠다.”라고 하자 비구니 스님이 한마디 쏘아 부쳤습니다. 

“아니 글자도 모르면서 어찌 경전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혜능대사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누가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너는 달을 보느냐? 아니면 손가락을 보느냐?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 야지 손가락을 봐서 되겠느냐?” 이와 비슷한 페르시아의 속담이 있습니다. “곰팡이가 핀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진리를 찾아라 달을 보기 위해서는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라”. 여기에서 책은 나침반을 의미합니다. 즉 책은 나침반과 같이 진리를 찾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나침반은 방향만 제시할 뿐 목적지에 도달하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이 나침반에 해당됩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경전입니다. 그러나 경전에만 머물러 있으면 어찌 될까요?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에만 머물게 됩니다. 손가락을 떠나려면 경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진리를 스스로 깨우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명상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좌선 또는 참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행이 참으로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승이 학승보다 낫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선승이 참선을 할 때는 화두(話頭)를 사용합니다. 화두는 참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던지는 문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참선을 하면서 화두에 집중하고 계속 의문을 가지며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하면서 화두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 망상이 자꾸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일반인은 5분도 화두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에 집중하기 위해 입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법을 하고 이를 계속하다 보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목에서 저절로 나오는 염화두로 바뀌게 되고 이를 놓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일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가 이루어지고 간화두가 되었을 때 참 의심이 들게 되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참화두라고 합니다. 참화두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칠일 이내에 비로소 깨우침을 득하게 됩니다. 어떤 스님은 9일 동안이나 면벽을 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참선을 하고도 깨우침을 얻지 못했다 합니다. 실제로 불교 통합 종단 출범 이후 50년간 조계종 출가자 50만 명 중에서 단지 20명만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정받는다 하니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상상이 갑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범부야 또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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