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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테크니션 Jun 20. 2020

세월이 가면

청소년 시절 잠을 청하려 불을 끄고 드러누워도 잠이 오지 않으면 라디오를 듣곤 했습니다. 컴컴한 어둠에 묻혀 라디오의 음악프로를 들으며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운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 박인희라는 가수가 낭송한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애잔한 배경음악 위에 그녀의 조용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가 얹힌 이 음악은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 시절에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척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 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 목메어 우는데”


이 시는 명동백작, 댄디 보이라고 불릴 만큼 잘생기고 지적인 용모를 가진 박인환이라는 시인이 쓴 시입니다. 박인환 시인은 서른이라는 짧은 나이로 삶을 끝냈지만 그가 남긴 시는 많은 사람에게 긴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인 옆에는 항상 술이 따라다녔는데 이 시도 전쟁 중이던 1952년 어느 날 휘가로라는 다방에서 친구 문인 들과 나애심이라는 가수와 술자리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를 쓰고 그의 친구 이진섭이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하자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작사 작곡 노래가 바로 한자리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이 노래는 나중에 역시 박인희가 리메이크하여 불러 큰 히트를 치게 됩니다.    


1988년 올림픽이 한창였던 시절 대한민국 남성의 노래방 신청곡 1위 노래는 또 다른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최호섭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였는데 당시는 물론 지금 까지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불러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대 나를 위해 웃음을 보여도 허탈한 표정 감출 수 없어 힘없이 뒤돌아서는 그대의 모습은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서로가 원한다 해도 영원할 순 없어요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 서면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노래와 시에서도 표현했듯이 세월이 가면 사랑은 떠나도 추억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에게 세월이 가면 언젠가는 사랑도 가고 기억도 잊히고 인생도 갈 수밖에 없습니다.

2019년도 봄 풀 꽃의 향기를 채 맡기도 전에 어느새 12월의 겨울나무가 서글퍼졌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갔고 또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작가 미상의 어느 한시에서는 세월의 무상함을,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流水不復回(유수불부회)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行雲難再尋(행운난재심) 흘러간 구름은 다시 볼 수 없네. 

老人頭上雪(노인두상설) 노인의 머리 위에 내린 흰 눈은,

春風吹不消(춘풍취불소) 봄바람 불어와도 녹지를 않네. 

春盡有歸日(춘진유귀일) 봄은 오고 가고 하건만, 

老來無去時(노래무거시) 늙음은 한번 오면 갈 줄을 모르네. 

春來草自生(춘래초자생) 봄이 오면 풀은 절로 나건만, 

靑春留不住(청춘유부주) 젊음은 붙들어도 달아나네. 

花有重開日(화유중개일) 꽃은 다시 필 날이 있어도, 

人無更少年(인무갱소년) 사람은 다시 소년이 될 수 없네. 

山色古今同(산색고금동)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으나,

人心朝夕變(인심조석변)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네.


세월이 가면 우리들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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