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의 심리를 정신분석으로 해석해 볼 때
여기,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는 매우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생계에 대한 걱정은 없었지만 눈앞에서 부모님이 살해당한 모습을 목격한 트라우마로 오랜 기간 동안 고통에 시달립니다. 부모님을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기에 왜 살해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아이는 범죄로 가득 찬 이 도시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킨다면, 부모님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범죄자들과 맞설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을 구비합니다. 그리고, 부자로 잘 알려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밤의 어둠 속에서 범죄자들을 직접 처단하는 배트맨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사실, 원한다면 좀 더 편안하게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 그리고 사회적 지위까지 있으며 알프레드라는 믿음직스러운 집사도 있죠.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 있더라도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브루스 웨인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입니다. 도시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 사회악을 처단하겠다는 결심. 그는 때로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서도 이러한 결심을 꺾지 않습니다.
어느 날, 고담시의 시장이 살해당합니다. 살해당한 시장의 시체를 보면서 배트맨은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죠. 그런데 그 시체에는 범인이 남긴 단서가 있고, 마치 보란 듯이 배트맨에게 쓰인 편지가 있습니다. 왜 이 범인이 자신을 지목했는지는 모르지만, 시장이 왜 살해당했는지를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 사건의 이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시장 다음에는 고위 경찰, 검사, 공직자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면서 배트맨은 그동안 직접 상대해 왔던 범죄자들보다 더 악독하고 시민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일으키는 거대한 범죄에 직면하게 됩니다. 범인이 남긴 단서를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마침내 퍼즐이 맞춰지고 사회의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할 고위 공직자들 중에 부패한 세력들이 그동안 고담시를 좌지우지하고 있었음을 알아챕니다. 게다가, 이 거대한 사건에 최종적인 흑막으로 지목된 사람은 과거에 아버지가 목숨을 구해 줬던 마피아이고 항상 정의의 편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가 그 인물과 잠시 손을 잡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절망에 빠지죠.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혼란해하는 브루스 웨인에게 집사 알프레드는 아버지가 잠시 그 사람과 손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해 부끄러워했고 잘못을 바로잡고자 살해당한 그날 경찰서에서 자수할 생각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고담시를 좀먹던 부패 세력은 잡았지만, 이 일의 시작인 수수께끼의 범인 리들러를 잡는 일이 남았습니다. 리들러가 남긴 마지막 수수께끼를 푼 배트맨은 리들러가 아버지가 시장이 되어 추진하려고 했던 재개발 프로젝트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무산이 되면서,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리들러는 붙잡히기 전 이미 설치해 둔 폭탄으로 고담시를 물바다로 만든 뒤, 무고한 고담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리는데 더 무서운 것은 리들러 본인은 감옥에 갇혔어도 리들러의 계획에 동조하는 추종자들이 그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개인적인 복수의 일환으로 범죄자들을 소탕해 온 배트맨이지만, 이번 일에서는 더 이상 어둠으로 숨을 수 없었죠. 그리고 왠지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이는, 죽은 전 시장의 아들을 구해내고 고담 시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킵니다.
이러한 배트맨 캐릭터를 정신분석으로 이해해 보려 합니다. 배트맨은 정의로운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진 집에서 태어났죠. 그러나 한 익명의 범죄자로 인해 그러한 평화로운 일상은 깨어지고 맙니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 그리고 큰 사건이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정신분석의 핵심인데 브루스 웨인은 눈앞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했고, 그 조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해 사람마다 다양한 방어기제를 펼치게 되는데, 배트맨의 경우에는 전위, 합리화, 승화를 사용하게 되죠.
전위(Displacement.)는 치환, 전치라고도 해석되는데 원초아의 충동은 표현하되 초자아가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수용 가능한 목표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분노를 당사자에게 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풀 때 전위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트맨의 경우에는 부모님을 죽인 범죄자를 잡아 복수를 하고 싶지만, 범인을 잡기 어려우니 넓은 범위로 확장시켜 범죄를 저지른 모든 사람에게 복수하는 방향으로 틀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합리화(Rationalization)가 일어나죠. 합리화는 원초아의 충동이 꿈틀거릴 때 초자아가 반대하지 않도록 그럴싸하게 이유를 붙여 무마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배트맨은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어 죽이고, 복수하고 싶죠. 그러나 폭력, 살인 등의 범죄는 초자아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기에 자아는 "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범죄자를 처단하는 거야"라는 변명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승화(Sublimation)는, 가장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인데 원초아의 충동을 심적으로 덜 위험한 에너지로 변화 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은 배트맨이 부모님의 복수를 하고 싶지만 그걸 그대로 표출하기에는 초자아의 반대가 심하므로 "개인적인 복수를 한다"에서 "나쁜 범죄자를 처단한다"로 승화시켰고 이러한 과정에서 배트맨은 범죄자들을 처단할 때 살인은 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죽은 사건에 대해서도 정신분석으로 이해해 보자면, 배트맨은 행복한 가정 속에서 살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여겼죠. 그러나 리들러의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결코 완벽한 사람은 아니며 깨끗하지 못한 사람과 결탁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는 아버지를 믿고 따랐던, 그렇기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고자 그동안 목숨을 걸어가며 배트맨으로 살아왔던 삶의 목표에도 혼란을 주는 정보였죠. 그동안 가져왔던 신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 집사 알프레드는 본인이 알던 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으며 100%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본인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알프레드는 배트맨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항상 브루스 웨인을 아끼고 지지해 왔습니다. 배트맨은 알프레드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투영시켜 왔는데, 즉 전이 현상을 보여 온 것이죠.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이런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하는 소망을 알프레드와의 관계에서 투영시켜 온 것입니다. 비록, 배트맨은 초반에 알프레드에게 "당신은 아버지가 아니"라면서 세상에 홀로 놓인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지만, 중간에 알프레드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며 알프레드가 브루스 웨인에게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 주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 왔음을 알게 되며 그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들러와의 관계입니다. 많은 히어로물에서 나오듯이,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때로는 악이 사라지면 선이 악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즉,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면서도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가 성립되지 않는 관계이기도 하죠. 리들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 즉 토마스 웨인(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이 죽으면서 재개발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그렇게 되면서 고아로 자란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리들러는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토마스 웨인의 탓이 아니라 토마스 웨인이 죽으면서 그가 기부했던 재개발 프로젝트의 기부금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길 생각밖에 없는 부패한 관료와 정치인들을 탓해야 했습니다. 물론, 리들러는 이 과정에서 해당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처단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건의 원인을 토마스 웨인으로 지목하면서 그의 주장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리들러는 브루스 웨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같은 고아이지만 너는 부유하게 자라서 아무 걱정도 없었을 것 아니냐며 빈정대고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그의 아버지 잘못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이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실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신이지만 그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실질적으로 죽인 사람이 배트맨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죠. 이는 미성숙한 방어기제인 투사( Projection)가 작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리들러는 같은 고아지만 자신과 다른 처지의 배트맨을 질투하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타인의 탓, 사회의 탓을 하며 나쁜 길로 빠져든 모습을 보여줍니다.
배트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복수로 과거를 바꾸지 못한다. 흉터를 이겨내야 달라질 수 있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정신분석에서는 과거의 특정 사건이 매우 중요하고, 그러한 사건은 평생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트맨의 대사처럼, 복수를 한다고 해서 과거를 어차피 바꾸지 못할 것이라면 복수를 위해 노력하고 힘들어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운,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를 바꾸려 들지 말고 현재 남은 흉터를 잘 어루만지고 달래야 합니다. 흉터를 보면서 계속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흉터가 나에게 남긴 의미, 그리고 그 흉터에 새로운 살이 돋아나게 하려면 흉터를 잊으려 몸부림치기보다 가끔 상처를 드러내어 통풍도 해 주고, 약도 정성스럽게 꾸준히 발라줘야 할 것입니다. 현재는, 미래는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