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뒤, 2년 뒤의 모습이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고 느껴질 때
"저, 퇴사하려 합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들어갔지만 역부족이었다. 험악해진 분위기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 한 마디를 겨우 얘기하고 나서 근 30분간 이루어진 면담은 주로 듣기에 가까웠다. 중간중간 왜 퇴사하려 하는지, 어디로 이직하는지, 이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드문드문 이야기 한 기억은 나는데 30분간 멘탈이 탈탈 털리고 나서 드는 생각은, "나, 이직 결심하길 잘했구나"라는 결론이었다.
물론, 이직을 결심한 사람이 웬만해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이미 맘 떠난 사람에게 좋은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면담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도 회사에 굉장한 미안함과 남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한가득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면담 이후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날 수 있겠다는, 어떤 확고함 같은 것만이 남았다.
첫 입사한 직장에서 10년 넘게 근무했고, 팀은 몇 번 옮기긴 했으나 전체 업무경력을 요약하면 한두 개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을 정도라 나름 이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었다. 그리고 작년 말 팀장 보직을 받게 되면서 비록 팀원은 적지만 본격적인 리더 역할을 처음으로 경험해보기도 했다. 한 업계에 오래 있었다는 것은 그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우대 조건을 갖게 되지만, 희소한 산업군의 경우에는 다른 업계로는 확장하기 어려운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에 많은 채용 공고에는 특정 산업군 근무자를 우대한다는 조건이 대부분 붙게 되는데, 나의 경우에도 콘텐츠 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기에 콘텐츠 업계 내로 옮길 경우에는 메리트가 있었다. 최근, 콘텐츠 업계는 OTT 플랫폼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한국 콘텐츠의 제작 퀄리티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산업이 굉장히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데 이러한 확장세에 맞춰 새로운 신생 회사나 기존 회사의 신규 서비스 출시 등으로 채용 공고들이 상당히 많이 올라오고 있었으며 다행히도 그 기회를 잡게 되었다.
회사에 10년 넘게 다니다 보면, 그리고 팀장 보직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마인드 자체가 사측으로 변하게 된다. 회사를 위해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하고, 때로는 나보다 회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며 일에 대한 책임의식도 더욱 생기게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몇 가지 계기가 없었더라면 이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속 이 회사에 다니는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보면 사소하지만 그 사소한 일들이 누적되어서 생긴 결과였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사소한 계기의 첫 번째는 "이 조직에서는 내가 오랫동안 해 온 이 업무에 대해 전문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구나"라고 느낄 때였고 그다음으로는 “내가 회사를 생각하는 것만큼 회사는 나를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느꼈을 때 이직에 대한 확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10년 넘게 다닌 회사에는 고운 정, 미운 정이 있어서 아직도 회사를 생각하면 앞으로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먼저 떠나는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1년 뒤에도, 2년 뒤에도 크게 변화가 없을 것 같았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조직에 가서 초기에 조금 고생하더라도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물론, 새로운 조직에서의 적응에 대한 걱정도 크고 지금 내가 그리는 장밋빛 미래만큼 업무의 자율성이 얼마나 주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안 가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가서 부딪쳐 보고, 그때 내 커리어의 방향성을 다시 설정해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이직을 결심하고, 퇴사를 공표하고,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그간의 업무 히스토리를 정리해 보면서 이제 점차 이직이 실감 나고 있다. 나의 첫 회사에서의 경험이 앞으로의 내 커리어를 확장해나가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