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도 맛이 있다는 걸 아는가.

by 김동현

어둠에도 맛이 있다는 걸 아는가.

최근 어디선가 스쳐 읽고는, 원문을 찾지 못한 채 그 문장만 오래도록 질겅거렸다. 무슨 맛일까, 혀끝에 질문이 맴돌았다.


한때는 "심연을 오래 바라보면 그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라는 문장이 나의 밤을 대신해주었다. 너무 유명해서일까, 이제 그 말은 사람들 속에서 희석되거나 변주된다. 오래 살아남은 것들이 늘 그럿듯, 문장도 시대의 습도를 입는다. 변치 않는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 그러나 물리 법칙조차 관측의 틀과 조건에 따라 값을 달리 내놓는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어둠의 맛"이란 말을 하나의 새로운 관측 장치처럼 받아들인다. 밤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밤을 '먹어'보라는 초대장처럼.


첫째는 감각의 층위다. 보이는 어둠은 대개 공백이지만, 맛보는 어둠은 분자감으로 다가온다. 장마 뒤 골목의 습기, 흙이 피워 올리는 미세한 철분 냄새, 오래된 난간에서 번지는 금속의 까끌거, 탄 나무가 남기는 그을음의 떫은기. 이런 맛들을 천천히 굴리다 보면, 어둠은 부재가 아니라 풍미를 지닌 현존으로 고쳐 앉는다. 침묵은 소거가 아니라 응축에 가깝고, 시커먼 색은 색채의 종말이 아니라 모태에 가깝다. 혀가 먼저 알아챈다. 입술이 오물거린다.


둘째는 심리와 존재의 층위다. 맛을 안다는 건, 충분히 오래 씹었다는 뜻이다. 두려움은 짠맛으로, 상실은 떫은맛으로, 고독은 미세한 타닌으로 남는다. 그러나 쓴 것의 바닥에는 늘 묘한 단맛이 숨어 있다. 오래 앓은 슬픔이 어느 순간 감수성으로 숙성될 때, 우리는 그 단맛을 뒤늦게 감지한다. 쓰다 달다, 혀가 먼저 배우면 마음이 나중에 따라온다. 그 배움은 살아남음의 기술과 닮아 있다. 어둠의 요철을 훑어 본 이만이, 비슷한 밤에 다시 들어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셋째는 인식과 윤리의 층위다. 우리는 흔히 빛을 기준으로 세계의 가치를 매긴다. 낮의 속도, 밝음의 효율, 눈부심의 성과. 그러나 어둠에도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하는 태도는 상처와 결핍, 변두리에 붙은 시간을 폄하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작은 약속일 테다. 이는 고통을 미화하려는 몸짓이 아니다. 그 고통이 남기는 미세한 데이터를 미각처럼 세분화해 읽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그냥 힘들었다"로 뭉개지 않고, 힘듦의 결을 구분해 이름 붙이는 일. 그 이름들이 쌓여 타인에게 닿는 언어가 되고, 닿음은 곧 시작이 된다.


넷째는 미학과 작법의 층위다. 밝음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형상이 오히려 어둠에서 윤곽을 얻는다. 글도 그렇다. 여백, 침묵, 결핍을 소극적 공백이 아니라 능동적 균형추로 데려오는 일. 한 문장을 덜어내면 다른 문장이 도리어 살아나기도 한다. 소리를 낮추면 호흡이 멀리 간다. "맛"이라는 어휘가 여기서 효력을 발휘한다. 공백을 텅 빔이 아닌 여운의 풍미로 격상시키는 것, 그리하여 독자의 입안에 오래 머무는 잔향을 남기는 것. 글의 완성은 때로 숙성의 시간에서 온다.


이렇게 보자면 "어둠의 맛"은 공감각적 은유가 아니라 밤을 통과하는 생활의 기술에 가깝다. 감각의 층에서 시작해, 심리의 소화 과정을 거쳐, 인식의 분류법에 닿고, 끝내 미학의 태도로 정착한다. 맛본다는 동사는 몸과 마음을 호출한다. 몸이 먼저 배우고, 사유가 그 뒤를 따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새벽의 선명함을 낮의 밝음이 아니라 밤의 잔향에서 배운다. 쓴맛이 남아 있어야 단맛을 구별할 수 있고, 단맛을 알게 되면 쓴맛을 서둘러 외면하지 않게 된다.


언젠가 모은 문장들을 펼쳐놓고 이런 생각을 적어본 적이 있다. 밤은 세계의 실패를 숨기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식어 가는 속도를 천천히 보여줄 뿐이다. 그 천천함 속에서 비로소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말의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선택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어둠의 속도로 생각하고, 어둠의 방법으로 말하며, 어둠의 리듬으로 한 문장을 마친다. 그러면 낮의 언어조차 덜 눈부시다.


어둠에도 맛이 있다는 말은 결국 이렇게 들린다.

빛의 사전으로는 번역되지 않는 것들을, 혀로부터 다시 배우자는 제안.

나는 오늘도 밤을 한 숟갈 떠서, 혀끝으로 천천히 배운다.

새벽을 아는 법은, 언제나 어둠의 맛에서 시작되니까.




KakaoTalk_20250908_065256338_04.jpg?type=w1 Anthony McCall: Works 1972-2020 (in 푸투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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