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나를 쓰는 일이다
기록이 좋다.
그때의 내 감정을 소중히 붙잡아두는 일,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들춰보는 그 순간의 집중이 좋다.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너무 빠르고, 심지어 나는 나조차도 자주 잊는다.
그러니 기록은 다정한 기억의 백업이자, 잊혀질 권리를 유예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손글씨를 좋아한다.
그래서 당근마켓에서 만년필을 샀고, 질 좋은 두꺼운 종이도 함께 구입했다.
글씨에 제법 자신이 있었고, 손으로 쓰는 일 자체가 여타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나를 돌아보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못 가 그 습관은 무너졌다. 편리함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애틋함을 이긴다.
아날로그는 과거일 때 가장 빛난다.
처음 기록의 도구로 택한 것은 핸드폰 메모 기능이었다.
항상 지니고 다니는 기기였으니, 그 안에서 매일의 감정이나 순간을 적어내는 건 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곧 한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나는 핸드폰을 잘 모른다. 잘 쓰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정말로 잘 모른다.
무언가 적으려고 하면 어김없이 자판이 불편했고, 자꾸만 핸드폰을 멀리 두고 있는 내 모습이 있었다.
이따금 나도 모르게 어르신들처럼 화면을 손끝으로 쿡쿡 눌러가며 겨우 몇 자 입력하는 나를 보며, 결국 그 기록 방식도 멈췄다.
그 다음은 엑셀이었다.
키보드로 타이핑이 가능했고, 셀 단위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이 어딘가 정돈된 감각을 주었다.
영화, 차(tea), 향수, 전시회… 탭을 나눠가며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컴퓨터에 저장된 그 문서는 이동성과 접근성이라는 가장 큰 벽 앞에서 무너졌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본 뒤, 주인공 해준처럼 스마트 워치로 녹음하며 하루를 정리해볼까 싶어 시도했으나, 단 하루만에 실패했다.
나는 소리보다 글이 편하고, 소리 내어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어쩐지 부끄러웠으므로.
그렇게 방황하듯 여러 매체를 전전하다가, 나는 결국 Notion에 정착했다.
클라우드 기반이라 장소의 제약이 없고, 모바일과 PC를 오가며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그 안에 내 문화생활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보고 들은 영화, 마신 차의 향, 처음 써본 향수의 여운, 인상 깊은 문장 하나…
단순히 정리하는 것을 넘어, 나는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구조의 감정을 자주 반복하는지를 기록하고, 읽어가기 시작했다.
기록은 나를 저장하는 도구이자, 되읽는 방식이다.
Notion은 내 취향을 분류하는 매뉴얼이 되었고, 그 매뉴얼은 곧 <나 사용법>의 초안이 되었다.
기록을 쌓는다는 건 단지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질감을 객관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리된 조각들 위에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나를 들여다본다.
이건 어쩌면 ‘나를 살아내는 일’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매일, 은 아니고… 가끔 기록한다.
그 기록을 보며 나를 조금 더 아끼고, 이해하고, 정돈해보려 한다.
잊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를 제대로 써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만의 방식이면 된다.
심지어 요즘은 아이디랑 비밀번호도 자꾸 까먹어서, 결국 그것도 Notion에 적는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로, ‘나 사용법’이 맞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