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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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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Dec 09. 2022

그 후

단편

그곳은 마치 수세기 전 포화로 뒤덮인 유럽,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미 연합군의 전투기들이 휩쓸고 지나간 드레스덴의 모습과 같았다. 성한 모습의 건물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혹여나 말끔한 모습의 건물을 찾았다 하더라도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 바라보면 무너져 내린 건물의 뒤편이 눈에 들어왔다. 뼈대만 남은 건물들은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듯이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뼈대만 남은 건물들 주위로 뼈대만 남은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딱딱히 굳은 살점과 내장기관만이 남은 시체들은 파리가 날아와 가능한 모든 공간에 알을 까놓았고, 꿈틀대는 구더기가 자신의 구역임을 알리기 위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바삐 오갔다. 파리 알과 구더기를 먹기 위한 개미들 또한 줄을 지어 차례로 도착했다. 인간보다 앞서 생존해온 그들이 눈앞에 펼쳐진 무료 뷔페의 기회를 놓칠 일이 없었다. 들개들이 무언가를 입에 물고 바쁘게 오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을 알 수 없는 사람의 토막 난 팔이나 다리였다. 그러한 들개 자신들도 앞다리나 뒷다리가 하나 씩 없거나 귀 한쪽이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결핍을 다른 종의 상실로 채우려는 듯 한 기괴함이었다. 


워. 노르스름한 색의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한쪽 발을 쾅하고 강하게 바닥에 내리쳤다. 토막 난 팔 한쪽을 물고 있는 들개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지만 입에 문 식량은 놓치지 않았다. 개가 남자를 향해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그르렁거렸다. 남자의 덩치는 마치 산짐승처럼 거대했고 얼굴 전체에는 정돈되지 않은 수염으로 가득했기에 개는 그를 곰이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었다. 개의 입에 물린 토막 난 팔의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은빛 반지가 앙상한 건물 사이로 내리쬐는 겨울 햇빛에 비추어져 반짝거리며 남자의 눈을 멀게 했다. 남자의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개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는 안주머니를 뒤져 종이로 곱게 말은 토바코 잎을 꺼내 입에 물었다. 아직 조그마한 불씨가 남은 잔해더미에 가까이 붙여 인공호흡을 하듯이(하지만 숨을 밀어 넣는 게 아닌 반대로 숨을 빨아들이는) 여러 번 인위적인 호흡을 하자 담배 끝에 불씨가 옮겨 붙으며 자욱한 연기를 만들었다.


피와 흙으로 얼룩진 푸르스름한 색의 군복을 입은 남자가 한 손으로 건물의 잔해를 뒤지고 있었다. 지붕과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린 건물 안, 검게 그을린 건축자재 잔해 아래 깔려 있는 침대보가 보였다. 얼굴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길거리에 널린 뼈대만 남은 해골과 다를 바 없었다. 잔해 더미에서 홀로 빠져나와 있는 가냘픈 손의 약지에 끼워진 은색 반지를 본 그는 기이한 괴성을 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 앞에서 그는 간절히 신을 찾았다. 그의 왼쪽 팔이 있었던 자리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마침내 잔해더미를 전부 들어낸 그의 눈앞에는 뭉개진 토마토 같은 모습의 시체가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다시 한번 신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을 찾는 그의 말투가 다른 뉘앙스를 드러냈다. 그가 침대 위에 흘러내려 꾸덕하게 굳은 장기들을 손으로 쓸어 담아 원래 있던 자리에 밀어 넣었다. 뭉개진 지점토를 반죽하듯 밀어 넣고 자리를 옮기고 접고 피는데 온 힘을 쏟았다. 결국 포기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손으로 침대 위의 유일한 손을 잡고는 들짐승을 울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한 참을 숨죽여 울던 그는 뭉개진 머리맡의 베개 밑에 살짝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베개 밑에 손을 뻗어 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간 듯 누렇게 변색된 책이 그의 검붉고 구덕한 액체가 뭍은 손에 들려있었다. 


노르스름한 색의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문 채 그의 얼굴크기만큼 커다란 몸통의 위성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수화기의 끝에 달린 기다란 안테나가 저 멀리서 날아와 허공을 떠도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를 잡아 수화기를 통해 남자의 귀에 집어넣었다. “…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어미가 자신의 딸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 자식의 임종을 지키는 어머니의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파도가 넘어와 남자의 가슴을 적셨다. “…그 책. 꼭 찾아야 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 절대 이대로 제 딸아이 못 보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책을 구해오세요.” 간절한 중년 여자의 목소리에서 망망대해 위 자신의 실낱같은 희망인 뗏목에 의지해 슬픔의 파도에 맞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걱정 마십시오. 제 시간 안에 찾아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님의 딸아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루시는 제 손으로 살립니다.” 남자가 루시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참아왔던 울음을 쏟아내는 중년 여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끊은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남자가 자신의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남자가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고 다시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접힌 흔적들을 따라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낡은 사진을 꺼내 들었다. 사진 속 푸른색의 장교 군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가 스툴에 걸터앉아 어깨를 늠름히 편 채 카메라를 비스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날렵하게 솟은 콧날 양쪽으로 가로로 길게 늘어선 강인한 눈매는 그의 영광스러운 과거와 현재와 다가올 창창한 미래를 모두 담고 있었다. 한 손은 지휘봉을 들었고 다른 한 손은 책을 쥔 채 허벅지에 올려져 있었다,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은색 반지가 어두운 흑백사진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채 그가 믿는 진실한 사랑을 자랑스레 증명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사진을 바라보던 남자가 혼잣말로 뇌까리자 마치 말이 형상화된 듯 허연 입김이 만들어졌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이제는 그저 검게 탄 잔해더미가 되어버린 마을을 바라봤다. 사진 속 군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해골같이 앙상해진 얼굴이었지만 강인한 눈매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해골 같은 얼굴에 옅은 희망의 생기가 번졌다. 그는 책을 재빠르게 펼치고는 알 수 없는 형상의 문자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읽기 시작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그의 낭독이 계속될수록 그의 얼굴의 희망의 불씨는 밝아졌다. 책을 들고 있는 그의 시야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화들짝 놀라 낭독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넝마를 걸친 걸인 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새끼 장교인가 본데?” 한 걸인이 말했다. “이 새끼 옷을 빼앗아 입고 근처 주둔지에 찾아가면 공짜 밥을 먹을 수 있겠는데?” 다른 걸인이 말했다. “근데 우리는 둘인데 옷이 한 벌 밖에 없잖아?” 두 걸인이 서로를 쳐다봤다. “저 옷은 당연히 내 거야. 저번에 내가 토끼를 두 마리나 잡았던 거 네가 나 잘 동안 다 먹어 치웠잖아!” 한 걸인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역정을 냈다. “너는 아직도 그 이 이야기지. 그러면 너는 저번에 내가 빵 한 덩이 구해온 거 어떻게 했어? 네가 나 똥 싸는 사이에 홀랑 다 먹어버렸잖아!” 다른 걸인 또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더 크게 역정을 냈다. 두 걸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한 팔의 남자는 태연히 자신의 군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잘려나간 팔이 붙어있던 자리가 보였다. 마치 잘려나간 나무의 밑동과 같았다. “자. 가져가시오. 이제 이 군복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소. 해가 지는 쪽을 향해 반나절 정도 걸으면 우리 주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거요. 자. 얼른 받으시오. 한 명이 이 옷을 입고 음식을 배식받아 챙긴 후 나누어 먹으면 아무 문제없을 거요.” 한 걸인이 그의 군복을 넙죽 받아 들었다. 한 팔의 남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펼쳤다. 빈 손의 다른 걸인이 그의 책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나는 그 책이 갖고 싶은데 말이야. 배게로 쓰고, 큰일 보고 밑에 닦을 때 한 장씩 찢어 쓰면 아주 좋겠어.” 그가 책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애초에 책이 만들어진 이유만을 제외한 모든) 수만 가지 가능성을 상상하며 씩 웃어 보이자 몇 남지 않은 검게 썩은 치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한 팔의 남자가 급하게 책을 뒤로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안돼. 이 책은 안돼. 제발 부탁이오. 그 옷을 받았으니 그만 가주시오. 나는 지금 한 시가 급하단 말이오.” 한 팔의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걸인들을 설득하려 했다. “저 침대 위에 있는… 저 여인은 내 아내란 말이오… 그녀를… 그녀를 살리려면 시간이 없소. 그러니 제발… 제발 부탁이니 날 좀 그만… 그만 내버려 두란 말이오. ”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여기에서 자신의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나? 나도 내 아내랑 딸아이 세 놈을 다 잃었어.” “맞아. 나도 아내랑 딸, 아들놈을 다 잃었어.” 두 걸인들이 서로 누가 더욱 커다란 고통을 겪었는지 경쟁하듯이 몰살된 가족의 수를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마치 고통을 많이 겪은 것이 훈장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이 겪은 고통이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는 듯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들의 가족이 이제는 그저 남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상대로부터 강압적인 수긍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순간이었다. 한 걸인이 몸에 걸친 넝마의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보였다. 다른 걸인은 작은 손도끼를 꺼내 보였다. 그 칼과 그 손도끼에는 이미 굳은 지 오래인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말이야, 지금 우리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말이야, 배가 너무 고파, 너무 고파서 네가 말한 주둔지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서 말이야.” 두 걸인들은 식사를 앞둔 사람들 마냥 입맛을 다시며 한 팔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천장과 벽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의 뒤편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기가 구워지는 노릇한 기름 냄새도 검은 연기와 함께 날아왔다. 노르스름한 군복을 입은 덩치의 남자가 검은 연기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인이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주위에 널브러진 핏자국과 잔뼈들이 보였다. 깨끗이 살점이 발라진 뼈들은 새하얗게 자신들의 자태를 뽐냈다. 식사를 마친 걸인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토바코 입을 종이에 말아 피우고 있었는데 그 종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적혀있었다. 그 담배를 쥔 손가락에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가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덩치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모닥불 옆에는 같은 언어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걸인은 덩치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덩치의 남자는 걸인을 내려다봤다. “아이씨. 이 종이 질이 별로 좋지 않네. 밑이 다 헌 것 같아. 킥킥.” 다른 걸인이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헐렁한 바지춤을 올리며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팔 한쪽에는 책이 끼워져 있었다. 다른 걸인이 덩치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덩치의 남자가 책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다른 걸인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얌전히 책을 건넸다. 두 걸인들은 마치 곰을 만난 듯 최대한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덩치의 남자가 책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미 반 페이지 이상이 찢겨 나가 있었다. 덩치의 남자는 책을 모닥불에 던졌다. “씨발. 뭐 하는 거야. 아직 반 밖에 쓰지 못했는데. 이 새끼 안 되겠네.”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흥분한 한 걸인이 칼을 꺼내 들었다. 다른 걸인도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덩치의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한 걸인이 칼을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탕. 한 걸인이 머리에 생긴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놀란 다른 걸인이 반대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탕. 다른 걸인이 달리던 속도에 의해 바닥으로 다이빙을 하듯이 내다 꽂혔다. 덩치의 남자가 모닥불에서 불타고 있는 책을 바라봤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그는 자신의 약지에 끼워진 금반지를 꺼내 들었다. 반지의 안쪽에는 글씨가 각인이 되어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당신에게. 루시가.’ 그가 반지에 입술을 맞추었다. 탕.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로 가득 찬 이 지옥 같은 도시에 오늘도 새로운 시체 네 구가 추가되었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담은 시체들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개미와 구더기와 파리 때에게 서서히 분해되어 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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