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감에 대하여
레지던트 3년 차였다.
병원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전문의가 될 날도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나는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말에는 이미 어떤 허영 같은 것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병원에는 유명한 소화기내과 교수님이 계셨고, 그 교수님이 오래 맡고 있던 식도암 환자 한 분이 있었다. 환자분은 장기 입원 중이었고, 음식을 거의 삼키지 못했다. 식도 스텐트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막혔고, 그럴 때마다 몸은 더 말라갔다. 환자분은 늘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이라도 먹고 싶어.”
의학적으로는 PEG(위루)를 해야 할 시점이었지만, 환자분은 완강했다. 배에 관을 넣는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환자분은 그 기다림 속에서 점점 날카로워졌다.
레지던트들은 두 달마다 바뀌었고, 인수인계 때마다 “그 환자 조심해”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말을 들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의 나는 그 환자분이 불쌍했다. 너무 아픈데, 너무 오래 버텼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틈만 나면 환자분 병상으로 갔다. 바쁜 회진 시간 사이를 쪼개 불평을 들어드렸고, 때로는 손을 잡아드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누군가는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그랬다.
“왜 나아지는 건 없어?
나는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해?
너희들이 하는 게 뭐야!”
순간, 팽팽하게 버티던 내 인내심의 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배신감이었다.
‘내가 얼마나 신경을 써드렸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서운함은 곧 냉담함으로 바뀌었다.
그날 이후 나는 환자분과 거리를 두었다. 사무적인 말투, 기계적인 처치.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였다.
며칠 뒤, 교수님과 함께 회진을 돌던 중이었다. 환자분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쪽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교수님이 아니라, 나에게였다. 쪽지를 펼쳤다.
짧은 문장이 비뚤배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눈물이 핑 돌았다. 식도암 말기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먹지 못해 말라가던 그 몸으로 환자분은 자신의 짜증을 받아내던 젊은 의사의 차가워진 태도를 모두 느끼고 계셨던 것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친절은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나는 무의식 중에 보상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친절하게 대하면, 환자도 나에게 상냥해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거래였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나는 그분의 짜증조차 감싸 안을 그릇이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분에게 감정 소모를 하게 만들고, 상처를 드렸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분은 돌아가셨다.
병원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영구차 앞 유리에 환자분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마치 인두처럼 가슴에 찍힌 순간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진료실에서 수많은 환자를 만난다.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무뚝뚝하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그 환자분이 남아 있다.
나는 한때 환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좋은 의사가 되는 길이라고 믿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에는 다소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친절하려 했지만, 그 친절 안에는 나도 모르게 기대가 들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환자도 나를 이해해 주리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그 환자분은 나에게 다른 답을 남기고 떠나셨다.
환자의 고통은 언제나 의사의 친절보다 컸고,
의사의 역할은 그 고통을 없애거나 보상을 기대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곁에 서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함께하는 것.
아마도 좋은 의사란, 환자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거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