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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니체(尼體)가
공자(仲尼)를 찾아간 까닭은

공자에게 배운 니체(尼體) 이름의 의미

100년 전 니체(尼體)’가 공자(仲尼)’를 찾아간 까닭은?


서양의 니체와 동양의 공자, 이 둘 사이에 내가 알지 못했던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불현듯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니체의 ‘니’와 공자의 다른 이름인 ‘중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니’자가 나의 호기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공자가 다시 태어났다’는 뜻으로 공자에 버금갈 정도로 현명함을 이르는 중니재생(仲尼再生)이라는 말도 그렇고, 공자의 학문을 우러러 받드는 사람들을 일러 중니지도(仲尼之徒)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공자가 ‘니’라는 말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중니(仲尼)의 ‘니(尼)’는 어떤 의미일까? 



첫째, ‘니(尼)’는 ‘가깝다’ 또는 ‘가까이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니(尼)’라는 한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만약 니체를 ‘니체(尼體)’라고 명명한다면 니체 철학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니체(尼體)는 ‘몸에 가깝다’ 또는 ‘몸에 가까이 가다’로 해석할 수 있다. 몸에 가까이 간다는 의미는 몸을 둘러싸고 있는 허례허식이나 가식, 위장이나 포장을 걷어내고 벗은 몸, 즉 나체(裸體)로서의 나를 드러낸다는 의미다. 나체로 나를 드러내야 나의 정체(正體)나 전체(全體)를 알 수 있다. 나체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긴 물리적 모습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신념이나 타성에 물든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 심리적 모습이기도 하다. 나를 포장하고 위장하는 모든 관념의 옷을 벗어야 나의 몸, 나의 본질과 정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니체는 그래서 나체다. 나체의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고, 내가 누구인지를 묻고 또 물으면서 천 개의 얼굴을 가진 다른 니체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다. 



실제로 니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이고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파악하며, 인간의 신체가 갖는 철학적 의미를 포착한 철학자다. 몸에서 분리된 이성, 주객의 분리나 심신 이원론에 반대하고, 이성의 시녀로 전락시킨 몸을 전면에 부각한 철학자다. 그는 이성(작은 이성)이 몸(커다란 이성)을 지배한다는 말을 뒤집어 오히려 몸이 이성을 움직인다고 했다. 



둘째, ‘니(尼)’는 또한 멈춤이나 정지를 의미하므로 니체(尼體)는 몸(體)의 멈춤이나 정지(尼)를 의미하기도 한다. 몸의 멈춤은 변화의 거부나 현실 안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나로 재탄생하거나 변신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점검하고 전략을 탐색하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의 폭풍전야(暴風前夜) 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바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기절하듯 쓰러져 잠을 잔다. 허둥지둥 일어나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정신없이 전쟁터로 출근한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속을 하고 다양한 사이트에 들러 검색을 하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사색의 시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타인에게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 나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입에 올리는 데 하루를 허비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늘 바쁘고 힘든 것인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는다. 물음이 없으니 당연히 답을 찾으려는 노력 또한 없다. 그러나 이제라도 과감하게 벗어야 한다. 재촉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완전한 나체로 선 나의 몸을 들여다보며 물어야 할 시간이다. 몸은 말하고 듣고 본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잠시 멈춰 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몸이 가려는 방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셋째, ‘니(尼)’는 ‘비구니(比丘尼)’의 다른 이름이다. ‘니(尼)’는 또한 ‘화평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물질적 욕망이 춤을 추는 속세에서 벗어나 마음의 화평을 찾는 비구니에게서도 니체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니체는 차라리 고독해지라고 외쳤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하찮은 자들과 가엾은 자들을 너무 가까이에 두고 있다.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에서 벗어나라! 저들이 네게 일삼는 것은 앙갚음뿐이니”라고 외친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가장 심각한 정신적 허기를 느끼는 이유는 가난한 고독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고독(孤獨)한 시간을 가져야 내가 무엇에 중독(中毒)되어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고독하지 않으면 뭔가에 중독되어 더 이상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침묵과 함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없다. 고독은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다. 



니체는 물질적 욕망을 채우려는 ‘바구니’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밝혀 참된 나를 만나려는 ‘비구니’다. 비구니는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내 안으로 들어가지만, 바구니는 채울 것을 찾기 위해 밖으로 관심을 돌린다. 비구니는 버림으로써 깨달음을 얻지만 바구니는 채움으로써 만족을 추구한다. 비구니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지만 바구니는 욕망하는 물건과 대화를 나눈다.



니체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를 해설하는 한국의 유영만 교수를 유라투스트라로 임명했다. 그 책이 바로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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