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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하게 벗어야 확실하게 보인다

니체에게 배우는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의 지혜



화끈하게 벗어야 확실하게 보인다


니체(Nietzsche, 1844~1900년)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폼으로 읽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니체를 읽고 있다는 자족감에서 비롯된 전시용 책읽기였다고나 할까. 니체는 자신의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교수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예언했다. 니체는 100년 정도 지나면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했다. 그만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비유와 수사(修辭)가 등장하는 장편의 서사시나 다름없다. 그렇다 보니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이 책을 읽고 무슨 말인지 몰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니체가 다시 가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니체의 정체를 알고 싶은 호기심과 그의 전체를 꿰뚫고 싶은 지적 욕망이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니체를 읽고 또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니체의 글 사이를 유영하며 그의 사유를 좇았다. 그 길에서 그와 함께 바다를 건너기도 하고, 느닷없는 폭풍우를 만나 잠시 표류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서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다. 낯선 섬을 헤매다 산을 오르기도 하고, 발을 잘못 디뎌 추락을 경험하기도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산의 정상을 향해 기어올랐다. 그러다 다시 추락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자 그만둬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 앞에 니체의 문장이 나타났다.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 



니체는 나의 뇌에 주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 파동을 일으키고 내 피를 끓게 만들었다.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가 하면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니체는 속삭이다 울부짖었고 고함을 치다가 침묵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가슴으로 읽어가면서 천의 얼굴을 가진 니체로 변신하는 그 과정에 나도 함께 동참했다. 나는 점차 니체에 중독되어갔다. 가슴이 뛰고 피가 끓고 니체에 완전히 흠뻑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내가 니체를 읽었다기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니체가 내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황지우 시인의 <나는 너다>의 시처럼 니체는 내가 되었고, 나는 니체가 되었다.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이미 니체가 꿈꾸는 천 개의 얼굴로 천 가지 길 앞에서 길을 잃었다. 그렇다. 내가 니체를 읽는 이유는 니체에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우리가 니체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길을 찾는 방법이 아니라 길을 잃는 방법이다. 책에는 길이 있지만 그 길은 다른 사람이 걸어간 길이다. 어쩌면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진정한 나의 길인지 의문을 품고, 세상에는 한 가지 길이 아니라 천 가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니체는 시종일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냐?” 


그는 나의 존재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질문 중의 하나는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 대로의 우리가 되는가?’이다. 모든 지적 탐구의 주체는 ‘나’다. 아래는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의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어느 과학자도 알아낼 수 없으나,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삶의 기적이다.”


문제는 나는 나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또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나는 지금의 나일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새롭게 변신한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저편 미지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 존재는 주어진 상태로서의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신하는 과정으로서의 동적인 존재다. 니체에게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즉, 인간은 존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힘들이 투쟁 관계를 통해서 부단히 생성되는 것이다. 



니체는 끊임없이 벗는다. 존재의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벗고, 색다른 생각의 임신을 방해하는 두터운 각질을 벗겨내며, 변신을 방해하는 과거의 허물을 벗는다. 니체는 스스로 나체가 되어 또 다른 자신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니체는 그렇게 벗고 또 벗는다. 니체는 말한다. 존재는 벗어야 그 정체가 드러나며 비로소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나무의 본질은 나목(裸木) 일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간 존재의 본질 역시 나력(裸力, naked strength)에서 비롯된다. 나는 나(裸)일 때 참모습이 드러난다. 나의 본질은 나의 나체(裸體), 일말의 포장과 허식도 모두 걷어내고 마지막 남은 알몸에서 존재의 본질과 정체(正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의 신체(身體)를 나체(裸體)로 드러내고, 신체가 추구하는 욕망과 인간 전체(全體)의 모습을 탐구한 욕망의 철학자다. 알몸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줄 때 ‘야~!’ 하는 탄성이 나온다. 이것은 경이로운 발견, 낯선 마주침, 즐거운 상상 뒤에 찾아오는 감탄사다. 감동과 감탄의 탄성이 많은 사람은 야한 기질, 야성(野性)이 풍부한 사람이다. 


야성은 길들여지지 않은 품성이다. 변신은 지성(知性)으로만 되지 않는다. 변신은 감성으로 시작해서 야성(野性)으로 완성된다. 에로스가 로고스를 이기는 것처럼, 이 야생마적 기질이 야성이다. 꾸밈없는 생각, 길들여지지 않은 생각이 바로 야성이다. 생각의 임신을 방해하는 각질과 생각의 때를 벗겨내야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고, 새로운 변신이 시작된다. 야성은 기존의 생각, 중심부의 문맥에 갇히지 않고 변방에서 변화를 추구하려는 야심 찬 마음이다. 야성이 있어야 야망을 꿈꿀 수 있다. 야망이 있는 사람은 가슴이 뛰고 피가 끓고 불끈 주먹이 쥐어진다. 야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련과 역경도 파도를 타고 넘듯 유연하게 넘어선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했던 니체. 그가 말하고 싶은 한 가지 화두, 그것은 ‘생존 미학’이 아니라 ‘존재 미학’이다. 니체가 던지는 화두는 먹고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에게 얄팍한 자기 계발 비법이나 던져주는 생존 미학이 아니다. 니체의 화두는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존재 미학이다. 나를 나로 올곧게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안주하고 있는 나를 스스로 흔들어 깨워야 한다. 과연 나는 진정한 나로 살고 있는가? 근본에 관한 질문은 존재의 모습에 관한 물음이다.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질문이 존재를 더욱 튼실하게 만든다. 세차게 흔들려본 사람은 더 큰 시련과 역경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흔들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흔들린다. 내가 먼저 나를 흔들어야 남도 흔들 수 있다. 흔들어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낡은 나를 망치로 부술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두뇌를 수술하는 일이니 고통이 따르겠지만, 심하게 부서진 그곳이 바로 내가 다시 일어설 지점이다. 스스로를 파멸시켜야 또 다른 나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흔들고 깨부수면서 끊임없이 변신하는 길만이 생존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니체의 이 존재 미학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부디 이 아름다운 ‘나체’의 힘이 내가 니체를 만나면서 느꼈던 그 후끈한 감동처럼 당신에게도 화끈하게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실천자,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유영만 버전,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에서 던진 세 가지 질문


첫째, 니체처럼 뒤흔들어라: 나는 나로서 살고 있는가?


둘째, 니체처럼 깨부숴라: 낡은 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가?


셋째, 니체처럼 변신하라: 나는 끊임없이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는가?를 소개한다.


이어서 니체가 추구하는 신체성 중심의 철학이 어떻게 내 삶을 관통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결국 니체는 우리를 오리무중 했던 삶을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의 치유사, 깨달음의 전도사, 전쟁과 전사의 명수, 전복과 파괴의 스승, 잠언의 연금술사의 세계로 안내한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의 YOU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ZP_2mSUk_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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