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스승은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스승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고

가장 위대한 스승은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스승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학생이 구분되어야 한다. 선생은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우월한 자이고 학생은 아직 갈 길이 먼 열등한 자다. 학생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언제나 선생의 설명을 듣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우월한 위치에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선생은 언제나 열등한 위치에서 배움을 구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논리는 오랫동안 교육철학을 지배해왔던 신화적 사고방식이었다. 설명을 기반으로 배우는 사람의 앎이 생긴다는 사실은 비단 교육분야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뭔가를 알려주거나 전수할 때 따라다니는 당연한 진리였다. 이런 교육신화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교육철학, 특히 스승의 이미지를 전혀 다르게 구축한 알제리 태생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교육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혁명적 교육관을 알리는 사건의 전모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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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명을 듣지 않고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1818년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9쪽)“로 시작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칠 스승은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상황에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번역판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서 스승의 별다른 설명 없이도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지적 혁명이 일어난다. 이 책의 제목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고,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나아가 무지한 스승은 모든 학생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스승이다. 한 마디로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스승이 바로 무지한 스승이다.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 봤을 때 스승은 분명 존재하지만 전통적인 스승의 의미지처럼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학생의 앎의 원인이 된다. 이런 점에서 무지한 스승은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앎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하면서 배움의 의지를 불태우는 촉발점이 된다. ”자코토가 스승이었던 까닭은 그가 그의 학생들을 그들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고리 안에 가둬두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p.30). 자코토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배움을 향해 매진할 수 있도록 빠져나올 수 없는 코너에 몰아놓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 나올 수 있는 기반과 여건을 제공한 셈이다.


네덜란드 학생이 프랑스 말을 배우는 과정은 아이가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흡사하다. 아이가 모국어를 배울 때마다 부모님을 비롯한 누군가 그 언어적 의미나 사용법을 일일이 설명하는 과정이 따르지 않는다. 설명 없이 모국어를 아이가 터득하는 과정은 곧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무지한 스승이 프랑스 말을 가르치는 과정과 유사하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 상에 한 명도 없다”(p.36쪽). 모든 인간은 암기하고 기억한 것들을 연결시키고 그 관계를 이해하는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배운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고, 이전에 기억했던 것과 관계를 만들어서 연결시키는 것이다. 하나를 배우고 다음 것과 연결시켜 그 의미상의 차이나 이전과 다른 변화를 반복해서 이해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배움의 과정에 관여할 뿐이다. “글로 쓰인 페이지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p.24). 글로 쓰인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려는 의지를 제외하고는 텍스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즉 단어 안에는 그 단어의 단서를 설명하는 숨겨진 단어가 없다. 아이가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고 모국어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단어 안에 아이가 전혀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이 없어서 그걸 굳이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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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지능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자세의 문제다


교육은 할 수 있느냐에 관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려고 하느냐에 관한 ‘의지’의 문제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배울 수 있다”(p.29).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I can’t do it)는 말은 “나는 그것을 하기 싫다.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나는 그것을 할 의지가 없다”(I will not do it)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점에서 교육에서 스승의 역할은 학생이 이미 가진 지적 능력과 의지가 발현되도록 돕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는다. 다만 각자가 가진 의지의 차이에 따라 지적 능력을 사용한 결과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의 지적 능력은 평등한데 불평등한 것은 지적 능력이 발현된 결과다. 지적 능력이 원인이 되어 불평등한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 지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강제하는 의지의 강도의 차이가 지적 능력이 발휘된 결과상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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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진정한 덕목은 무지에 있다는 역설,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기존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자신의 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의지를 촉발시키는 데 있다. 《무지한 스승》은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전통적인 교수-학습 전제나 가정을 송두리째 부정한다. 《무지한 스승》은 우선 “모든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교육적 원리를 내세운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유식한 스승이 무식한 제자에게 지식을 설명하거나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다. 《무지한 스승》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설명의 무한 퇴행이다.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제자는 설명을 또 들을 수밖에 없고 설명을 듣는 제자를 바보로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한다. “우월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 전달할 수 있고, 또 학생이 배운 것을 잘 이해했는지 검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명의 원리다. 이것은 이제부터 자코토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의 원리가 될 것이다”(pp.20-21). 설명을 들을수록 설명 없이 뭔가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해진다. 당연히 세상을 주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과 식견도 없어지고 점차 설명하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살아간다.


무식보다 무시당하는지를 모르는 무지가 더 심각한 질병이다


설명은 무지한 자를 깨우치고 열등한 위치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항상 열등에 위치에 머물러 있게 고착화시킴으로써 영원한 바보로 전락시키는 데 있다. 배움은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기보다 스승의 의지와 제자의 의지가 만나는 곳에서 불꽃처럼 섬광의 깨달음이 일어나면서 발생한다. 진정한 교육은 없는 능력을 키워주는 문제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의지와 배우려는 사람의 의지가 만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 상에 한 명도 없다. 이 학습방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부르기로 하자”(p.36). 진짜 배움에 필요한 것은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려는 의지의 여부다.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설명하는 스승은 불필요하다. 설명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열등한 위치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조장하기 위한 조치다.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대중과 소통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은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지지를 먹고살아야 하는 딜레마 상황과 늘 맞닥뜨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우월한 열등자들의 역설’이다. 우월한 자로서 정치인이 겪는 딜레마는 열등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만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의 설명을 다 알아들을수록 우월한 자의 지위가 위협받는다는 점이다. 더 이상 자신의 설명이 무용해지고 무력해지는 순간, 자신의 우월성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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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학생의 무식(無識)보다 더 심각한 질병이 있다. 본인이 열등하다고 무시(無視)당하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無知)다. 무식하다는 사실보다 무시(無視) 당하고 있는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지 못하는 학생의 무지가 더욱 열등한 자의 틀에 갇혀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시집에 실린 <그날>이라는 시의 일부다. 같은 맥락으로 “모두 ‘무시’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주시’ 하지 않았다.”로 바꿔 써도 여전히 문맥은 통한다. 랑시에르가 평등과 더불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을 해방에 둔 이유를 생각하면 이 문장의 의미가 쉽게 와 닿는다. 해방된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의 치명적인 멍에에 예속되지 않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설명 체계에 종속되어 자기 주도적 관점을 잃어버린 사람은 설명으로 이해된 세계를 내가 바라보는 세계라고 인식한다. 설명 논리의 무한 퇴행 회로에 갇혀 있는 학생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랑시에르가 교육을 통해 달성하려는 궁극적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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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본다


무지한 스승이 강조하는 또 다른 교육적 원리는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46쪽)”는 주장이다.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우면 거기서 배운 원리를 다른 곳에 적용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배우는 것을 연관시켜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기본적인 한 가지를 완벽하게 습득하고 나면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연관시켜나가는 과정을 무한 반복함으로써 앎을 확장시켜나간다.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 한 권을 이해하면 학생들은 프랑스어 전체를 학습할 수 있다.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 전체 안에 프랑스어를 이해하는 원리 전체가 들어있다.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우면 그 한 가지 안에 전체가 들어 있다. 혼돈이론 개념 중에서 후랙탈(fractal)이라고 있다. 자기 유사성으로 번역되는 후랙탈은 “부분 속세 전체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부분만 봐도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전체는 개별적인 것 안에 들어있다. 개별적인 것의 특성을 잘 파악해두면 전체의 모습도 어떻게 구현되는지 알 수 있다는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속담과도 맥을 같이하는 말이다. 프랑스어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외우면서 배우는 와중에 구체적인 것을 완전히 알고 나서 기존 앎을 바탕으로 다른 것과 연결하면서 모르던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이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pp.41-42). 우선 배우지 않으면 연결시킬 재료가 없다. 연결시킬 재료가 부실해지면 배움이 심화되거나 확장되지 않고 멈춘다. 배우고 기억하면서 연결하는 능력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평등한 지능이다. 《무지한 스승》에서 배운 가장 소중한 교훈은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유능과 무능의 관계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의지와 배우는 사람의 의지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스승의 역할은 뭔가를 전수하고 설명하지 않고 학생을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고리 안에 가둬둠으로써 배우려는 의지를 촉발시키는 데 있다. 의지와 의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강력한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며 한계나 불가능도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의지를 불러온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다”(p.110).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지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이 지능의 발현은 의지에 의해 드러난다. 의지로써 지능에 명령을 내려 나를 불평등의 덫에 가두려는 올가미를 벗어던지는 지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다. 랑시에르는 의지도 하나의 역량이라고 정의한다. “의지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심급이기에 앞서 스스로 움직이고자 하는 역량,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역량이다”(p.109). 의지가 한 인간의 영혼을 규정하고 능력을 개발하며 나다움을 드러내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전보다 더 강한 의지야말로 영혼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들고 강렬한 열망으로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탐구활동을 계속하게 만드는 뜨거운 엔진이다.


모든 학생은 저마다의 오솔길에서 사색의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은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은 유식한 스승과 무지한 학생을 전제로 스승은 보다 많은 깨우침을 주기 위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무지의 늪에서 건져내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이 이미 갖고 해석적 틀이나 범위를 넘어서는 색다른 가능성을 꿈꾸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선생이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의 세계로 학생이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질문을 통해 유인한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메논의 노예로 하여금 그 안에 있는 수학적 진리들을 깨닫게 만든다. 거기에는 앎의 길이 있을지언정 결코 해방의 길은 없다”(p.65). 많은 깨우침을 선물로 주는 것 같지만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은 결국 지도하기 위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바보 만들기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반면에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더 적게 가르치고 더 많은 깨우침을 스스로 얻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다. 무지한 스승은 스승의 우월한 지능으로 학생의 열등한 지능을 개발하려는 설명이나 질문보다 학생 스스로 원리를 터득할 수 있도록 딜레마 상황에 빠뜨린다. 이미 정해진 방향이나 방법보다 배우고 기억해서 다른 것과 스스로 연결시켜 앎의 무한 확장을 도와주는 역할에 스승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상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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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무지한 스승은 제자와 평등한 관계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고 해방적 각성의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다. 무지한 스승은 과제를 부여하고 난국을 돌파하는 제자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무심한 듯 관심을 보여주는 행동 관찰자다. 학생이 기대하는 답을 찾지 못한다고 쫓아가서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묵묵히 지켜보고 기다리며 “너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주어진 현상을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만든다. 학생이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난관에 부딪쳐도 지름길을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지한 스승은 스스로도 얼마든지 딜레마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의지가 충만하다고 의욕을 고취하는 사기충천자이자 의지 촉발자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이 고뇌하며 문제를 풀고 문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저마다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우리 각자는 진리 주위에서 저마다 포물선을 그린다. 비슷한 궤도는 없다. 그렇게 때문에 설명자들은 우리의 공전을 위태롭게 한다... 지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의지에 열린 무수한 오솔길이 있음을 잊는다”(p.118). 하나만의 진리는 없다. 저마다 해석한 진리,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해석한 일리만 존재할 뿐이다. 무수히 많은 이해의 포물선이 진리 주변에서 돌아가는 이유다. 이때 선생의 설명은 학생을 무수한 오솔길로 빠져서 사색의 향연을 즐길 가능성을 차단하는 장본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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