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떨림과 울림으로 공명을 만들어간다
누군가에게 사소한 일도 누군가에게는 수고한 일이다
모든 존재는 떨림으로 가능성을 증명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의지와 노력과 관계없이 세상은 돌아간다.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고 전철은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나 저마다의 볼 일을 보러 가는 승객들을 목적지에 내려놓는다. 시냇물은 쉬지 않고 강물로 바뀌고 강물은 바다로 몸을 던진다. 구름은 하늘을 벗 삼아 뭉게구름으로 뭉쳐 있다가 흩어지고,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진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비는 갑자기 소낙비로 변신하고 땅으로 떨어진 빗물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흐르다 사라진다. 새봄의 파릇한 새싹은 봄기운 덕분에 동면에서 깨어나며,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뎌낸 꽃들은 이른 봄부터 형형색색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서가에 꽂힌 책은 여전히 주인의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책상 위에 쌓인 책은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느라 가쁜 숨을 몰아쉰다. 밤새 잠을 자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 컴퓨터는 주인이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반가운 아침인사를 건네고 누워있던 볼펜은 한 번만 잡아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가지는 언제 또 어리도 흔들리지 알 수 없다는 듯 체념을 하고 굳게 잠긴 문은 주인을 기다리며 안과 밖의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다. 쓰다만 메모장은 다음 소식을 손꼽아 고대하고, 휴대폰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메시지는 응답을 요구하며 침묵의 항의를 한다. 언제나 내 무거운 체중을 불평 없이 받쳐주고 휴식할 시간을 온몸으로 내어준 의자는 피곤한 나를 언제라도 받아주겠다는 무언의 손짓을 한다. 뙤약볕에서 열기를 참고 맺은 열매 속에 깊은 자연의 온기를 담 든 커피는 진한 향을 온몸으로 밀어 넣으며 한낮의 여유로움을 선물로 준다. 그 사이 지나가는 차들의 경적 소리는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뒤를 이어 달려오는 차량행렬은 저마다의 목적지로 질주하고 있다. 온갖 소음과 열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도열해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로수는 가을 단풍을 만들기 위해 여전히 분주하다. 길을 걸어가던 수많은 사람은 옆 사람의 바쁜 발걸음에 밀려 자기도 모르게 잰걸음 내 딛으며 다시 일터로 향하고 있다.
말없이 내가 가늘 길을 함께 걸어온 신발은 오늘도 나에게 분발을 촉구하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나를 실어 나른 자동차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지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모두가 관심을 받기보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본분을 다하며 자리를 지키는 대자연의 향연이자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물과 도구,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가는 축제의 무대다. 내 주변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제공해주는 수많은 은인들, 여기에는 사람은 물론 사물과 도구, 장비와 기구 등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포함된다. 나의 작은 행동도 이들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나는 나와 관계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인 셈이다. 관심을 받기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자기 본분을 다해야 떨림이 전해진다. 모든 존재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로 자기 존재 이유를 알린다. 그때 들리는 소리가 떨림이다. 그 떨림이 누군가에게는 소음으로 들릴 수도 있고 소름 끼치는 울림으로 다가와 전율로 온몸을 휘감을 수도 있다.
떨림은 존재가 보내는 단독적인 선물이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사진은 마음을 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는 심장을 울리고, 멋진 상대는 머릿속의 사이렌을 울린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이가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6쪽).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에 나오는 말이다. 존재의 떨림은 서로의 울림이 된다고 한다. 누군가의 떨림에 반응해서 공명을 맞추지 못하면 울림은 없다. 한쪽은 떨림으로 자기 존재 이유에 대한 신호를 보내는 데 다른 쪽에서 아무런 울림이 없다면 떨림은 그냥 혼자 떨다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하려면 늘 관심을 갖고 살피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살펴보면서 유심히 관찰해야 상대의 울림에 떨림으로 반응할 수 있는 관계 맺음이 시작된다. 상대의 떨림은 즐겁고 행복해서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감탄과 감격의 소리일 수도 있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기 힘들어서 내뱉는 고통과 신음의 절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이유, 그것도 책상에 앉아서 하는 관념적 공부가 아니라 현장에 직접 몸을 던져 거기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현장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각적 예민함을 단련하기 위해서다. 누군가 어떤 침묵의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귀담아들으며 그 것도 나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려는 안간힘을 쓰지 않는 이상, 아우성은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질 것이다. 공부는 현장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틀에 박힌 생각을 뒤흔들어 깨우며 날 선 언어로 낯선 생각을 잉태하는 과정이다. “공부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고통의 언어”(9쪽)라고 김승섭 교수도 말한 적이 있다. 나의 고통은 지극히 1인칭 서사라서 타인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게 고통의 고통이다. 나의 고통을 나의 언어로 번역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나의 고통을 타인에게 말한 바를 누군가가 다시 그 고통을 언어를 매개로 재서술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다만 고통스러운 느낌을 느낌으로 감각할 뿐, 고통의 언저리에서 떨림으로 신호를 보낼 때 울림으로 감응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조치는 특별히 없다.
다만 그 고통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보살피려는 갸륵한 마음이 아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스며들 때 이심전심으로 고통의 공감대가 잠시나마 생길 수 있을 뿐이다. 살아간다는 의미, 살아낸다는 의미는 이처럼 저마다의 위치에서 존재가 보내는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하는 과정이다. 떨림과 울림의 방식과 스타일은 저마다 다르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관계의 출발이자 유지에 필요한 기본이자 기반이 떨림이고 울림이다. 떨림은 때로는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작은 정성을 더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보내는 과정에서도 일어난다. 선물에 담긴 정성은 성의 표시를 넘어서 상대를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미 선물은 상대를 위해 떨림으로 다가가는 신호탄인 셈이다. 대단한 선물도 아니다. 그 사람이 생각이 나서 준비하는 관심과 애정의 증표일 뿐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오로지 하나만의 선물을 위해 정성을 쏟는다. 그냥 ‘선물’이 아니라 ‘그 선물’이다. ‘그 선물’은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다. 그 선물은 어떤 선물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적인(singular) 선물이다.
살아있음은 단순하지만 황홀하고 놀라운 기적이다
선물은 ‘주고받으며(give and take)’ 표시하는 ‘성의’가 아니라 주고 나면 또 주고(give and give) 싶은 ‘정성’의 표시다. 대가를 바라는 ‘접대’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대접’이 선물의 기본 정신이자 자세다. 대접이 뒤집히면 접대가 된다. 이해타산에 기반을 두고 특정한 조건에 얽매인 접대를 받는 순간 나는 나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먹은 만큼 침묵을 지키거나 정당하고 올바른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없는 강압적 기제가 심리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선물은 접대가 아니라 대접으로 다가갈 때 떨림이 전달되며 울림으로 반응하는 공명이 조성된다. 선물에 담긴 떨림과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의 울림이 맞장구치면서 공명의 여운이 오랫동안 둘 사이의 관계를 따뜻하게 만든다.
존재의 살아내려는 떨림은 곤경을 풍경으로 만들어내려는 안간힘이자 몸부림이다. 비록 남이 보기에 미약한 실천이며 사소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힘겨운 싸움일 수도 있다. “어떤 이의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이 되는 현실은 얼마나 서글픈가.” 박주영의 《법정의 얼굴들》에 나오는 말이다. 그만큼 살아가는 세계는 사람마다 다르고, 살아감 속에서 몸으로 겪으며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도 다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내가 경험하는 세계만이 진리의 원천일 수 없다. 나에게 상식은 누군가에게 몰상식일 수도 있고, 나에게 진리는 누군가에게 무리가 따르는 허무맹랑함이 될 수도 있다. 오늘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사투를 벌이며 살아내려는 무수한 존재들이 보내는 떨림에 귀를 기울여보자. 익숙해져서 더 이상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일상적 만남이나 마주침에도 어제와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면 잡음처럼 들렸던 소음도 한 존재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한 존재의 떨림에 반응하는 그 어떤 울림도 없을 때, 떨림은 고독한 하소연이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존재가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수한 떨림의 진지한 반복을 통해 어제와 다르게 거듭나는 과정이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존재는 오늘도 자기 본분을 다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갈 뿐이다. 한 존재의 힘겨운 싸움이 떨림으로 전달되어 울림의 반응을 이끌어내든 그렇지 못하든 오늘도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며 어느 순간 비상하는 꿈으로 도약하는 삶을 살아간다. “살아있음이란 내게 햇살을 등에 없고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208쪽). 곽재구의 《길 귀신의 노래》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비상하는 꿈보다 매 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축적해서 한평생을 만들어가는 꾸준함으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살아있다는 그 단순한 놀라움과 존재한다는 그 황홀함에 취하여”라는 김화영 작가의 말처럼 살아있음의 놀라운 기적과 황홀한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하루를 맞이하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일리다
“인생은 잘 짜인 이야기보다 그 하나하나가 관능적인 기쁨인, 내일이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다.” 사르트르가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비평문에서 한 말이다. 삶은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 계획대로 잘 안 풀리는 일이 더 많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해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이 잉태되기도 한다. 우발적 마주침과 낯선 부딪침이 의도했던 산물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부산물을 낳는다. 산물보다 부산물에 뜻밖의 의미와 가치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또 만나는 순간이 아니라 어제와 다르게 다시 만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때, 시간은 틀에 박힌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오로지 나에게 주관적인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심리적이고 관능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35쪽).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말처럼 사소하거나 하찮은 거라고 치부하지 말고 모든 존재 자체의 경이로운 기적을 관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황홀한 감각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자.
누군가 베푼 작은 호의에도 머리 숙여 깊이 감사하고 그런 작은 기쁨을 주는 사람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사실도 단순하지만 놀라운 기적으로 받아들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식이 무너지고 기본이 무시되기 시작하면 존재의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하기는커녕 신뢰가 무너지고 실례를 나도 모르게 범하게 된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대단한 진리가 아니다. 기본을 지키고 선을 넘지 않는 평범한 일리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결례를 범하는 경우가 반복해서 발생하게 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나의 판단기준과 잣대로 일방적으로 재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사소한 일도 누군가에게는 수고한 일이다. 사소함과 수고함의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서 바라보는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다. 그 관점의 차이를 좁히고 메꾸려는 노력에 인간다운 미덕이 존재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역지사지를 넘어 측은지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되는 이유도 내가 모르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수많은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삶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주연 배우이자 각자의 삶에서 얼룩과 무늬로 직조해나가며 작품을 창조하는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