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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의 헤어짐은 불안한 다짐이다


당신과의 헤어짐은 불안한 다짐이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이기철의 '봄 편지' 중에서-


밤잠을 설친 찬 이슬 한 방울

풀잎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먼동이 터온다는 소식에 불안에 떨다

풀잎이 품어주려는 포옹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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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내리치는 소낙비,

구름이 품고 있는 희미한 햇빛에

잠시 달궈진 몸을 떨고 있다

잠자고 있다 심한 찰과상을 입은

공기 방울들 사이로 빗방울은

오늘도 하늘과 이별하고 물안개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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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끝에서 방황하는 한 문장,

다음 마침표를 기다리며 물음표를 품는다.

마침표를 떠난 물음표가

곡선으로 휘감긴 지난날의 얼룩에게 물어본다

물음표가 용틀임을 하며 마주침의 흔적을

마침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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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가 밤새 뒤척거리던 몸을 일깨운다

언어가 달려가 첫 느낌을 물어보지만

침묵으로 항변하며 번역을 거부한다

어제 덮고 잔 이불과 이별하며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하루가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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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즐거워하는 음악과

눈이 즐거워하는 그림 사이에서

가슴은 알아듣지 못하는

머리가 생각한 한 마디를 남긴다

마음은 벌써 그리움에 젖은

음악과 그림을 상상하며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머리는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간다


한 가지 정답만 요구하는 수학과

여러 가지 해답이 존재하는 문학이

새벽 물안개를 타고 강변에서 만난다

강물도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밤새 흘러내려왔고

바다도 낮은 곳에서 비상을 준비하지만

언제 소낙비가 되어 다시 수직 낙하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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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 위에 기거하던 글자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일어나

눈보라에 흔들리던 버드 나뭇가지를 만난다

행간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던 글자들은

삭풍에 떨면서 견디던 바위에게 안부를 묻는다

백 지위의 글자들은 천의 혀로 노래한다

독자는 글자들의 향연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시인은 책상 위에서 한 달 동안

말없이 서 있는 달력의 침묵을 말해야 하고

철학자는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고된 노동의 현장으로 출근해야 되는 이유를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먹구름 속에 태양을 노래하는 이유를 말해야 하고

소설가는 인생이 꼬여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은 말해야 한다

밤을 뚫고 살아남은 새벽은 오늘도 여기를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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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었음에도

하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아무리 물어봐도 알 길이 없다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각본도 쓸모가 없는 세상에서

우연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허공에 몸을 던진다


여전히 풀어야 문제와 숙제가

생각 없이 즐기는 축제보다 많은 인생이다.

꿈속에서 그리던 연인을 만나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가

범인을 대량 양산하고 있다

숙제와 결별하고 축제만 즐길 방법은

어느 경전에서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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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를 읽다가 길을 잃고 카페에 들려 냉수를 마신다

스피노자를 읽다가 휘둘리는 감정에 몸을 던지고

니체를 읽다가 욕망의 사다리를 만난다

플라톤이 새벽같이 일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건설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밤잠을 설치며

현실에서 진실을 찾으라고 설파하는 정언명령 사이에서

저녁노을은 오늘도 붉게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허공에 던진다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시간은 정거장에 멈추지도 않고 흐른다

시침은 시치미를 떼고

벌써 한 시간 째 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분침은 분통에 터지는 듯

앉은 자세로 어쩔 줄을 모르고

초침은 머뭇거리는 인간에게

재빠른 채찍을 날리며 서둘러 떠나라고 안절부절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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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와인 잔 속에 담긴 여인의 항거를 읽지 못하고

소주 한 잔 담긴 노동자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념은 한 순간도 절망 곁을 떠날 수 없는

절벽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며

늦은 가을 바람에 쓰러져가는

고개 숙인 벼이삭의 안간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념은 40도가 넘는 사하라 사막을 등지고 달리는

포기하고 싶은 남자의 속마음을 보듬어줄 수 없고

정념의 깃발로 나부끼다 신념의 손길을 기다리며

태우는 애간장의 고달픔을 달래줄 수 없다.

이념은 신념이 이끌고 가는 무모한 도전앞에

불안한 다짐을 하며 기다리는

새벽의 안타까움을 겪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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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파편이 증축한 이념의 터전에서 탈출하고

격전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며

얼룩으로 번진 저자의 숨결이

행간을 타고 끝없이 흐릅니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저자의 흔적이

다음 페이지로 향하려고 꿈틀거린다

책을 읽는 나는 행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마음은 벌써 끝에서 초조한 기다림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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