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종이비행기가 멀리 날아가는 까닭은?
올라가는 긴장감이 성취감을 주는 순간 사람은 자만과 오만의 친구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취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다. 온 세상이 다 나를 위해 존재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줄 착각이 들 정도다. 성공은 언제나 냉정한 자기반성을 외면한다. 대신에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제를 도모하는 기운을 북돋운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생각보다 심각해지기 시작하면서 가파른 상승 곡선은 더 가파르게 직선으로 곤두박질치는 경제 위기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도처에 늘 널려 있던 행운의 여신도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겨울옷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초가을의 따듯한 햇살이 갑자기 초겨울 철 모르는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친 격이다. 사실 이미 예년 날씨와 다른 이상 기후가 자주 나타났었지만 단지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바람이 분다. 다르게 살아야겠다
어느 목욕탕 간판에 쓰여 있는 말이 주목을 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곧 경기가 풀릴 것이고 한파도 따듯한 봄기운에 밀려날 것이라.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막연하게 시간을 보낸다. 막연한 시간에 기대는 순간 반전의 때는 오지 않는다. 오늘보다 더 심각한 때가 시시각각으로 출몰할 뿐이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래도 온몸에서 위기의 촉수가 자라기 시작한다. 마치 김주대 시인이 ‘진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벼랑 끝에 이른 삶은 허공에서 길을 찾는다/그때 몸 전체가 허공을 만지는 눈이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공포가 생을 전향시킨다/눈이 없던 곳에서 눈이 생기고/온몸에 발이 자란다.”
하지만 문제는 상황이 반전될 기미만 기다리고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약할 수 없는 경제빙하기를 겪으며 생존 자체가 불확실해지는 위험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하던 대로(大路)가 이들이 걸어온 인생행로(行路)다. 하던 대로에는 그동안 걸림돌도 장애물도 없었다. 관성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새로운 관점은 필요 없었다. 타성에 젖어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어 습관이 뒤집혀 하나의 틀에 박힌 관습으로 자리를 잡았어도 모르고 살아왔다. 거기에는 언제나 원래 , 물론, 당연이라는 세 명이 친구가 생각의 교도소에 갇혀 살면서도 바깥세상의 심각한 변화를 늘 원래 그런 거고 물론 그런 거며 당연한 현상이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제 이들에게도 심상치 않은 변화가 몸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전대미문의 위기의 실상이 매일 눈앞에 나타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바람은 새로운 감각을 불러온다. 그 감각을 통해 우리의 몸과 세계는 동시에 태어났다”(108쪽).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오는 말이다. 바람이 위로 불어 주어서 올라갈 때는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이제 올라가는 데도 역풍이 불어서 힘들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내려가는 길목에서 부는 역풍을 딛고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역풍의 위기가 새로운 감각적 깨달음을 몸에 아로새긴다. 이렇게 내려가다가 죽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올라가는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삶이 완전히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과 방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방향도 바꿔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바꿔야 한다는 신호다. 올라가는 길이 막혔다는 절망에 좌절하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제 내려가야 살 수 있다는 희망과 그나마 다행이라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제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보다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삶의 자세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을 선택하는 삶의 자세다. 우리는 지금까지 목적지에 가급적 빨리 도착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살아왔다. 내가 거기에 왜 도달해야 되는지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정해진 목적지는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될 인생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착역은 또 다른 종착역으로 출발하기 위한 간이역에 불과하다. 영원한 종착역은 죽어서 가는 무덤일 뿐이다. 이제 위로 올라가는 목적지를 찾기보다 어디로 내려가야 할지 방향을 설정하는 일 중요한 시기다. 방향 설정이 잘못된 상태에서 열심히 노력을 거듭할수록 설상가상으로 위기는 더 심각한 난국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다. 지금까지 무슨 노력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사실은 지금부터 방향을 선택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방향이 바뀌면 전혀 다른 삶의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도 목표를 달성하는 ‘오름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존을 확보하는 ‘내려감 패러다임’이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 지금과 다른 방향 설정은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방향만 찾을 수 있어도 불안감이 가중되고 불확실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희망의 끈이라도 잡을 수 있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꿔 그동안의 목표달성과 성공에 도취된 과거의 삶을 기꺼이 버리고 내려가기로 방향을 바꾼 사람들에게는 당분간 괴로움이 엄습하고 허탈감에 젖어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세를 낮추고 내려가려는 사람만이 추락을 면할 수 있다는 믿음, 이럴 때일수록 희망의 연대감으로 손 잡고 함께 난국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신념을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잘 나가던 내가 왜 내려가야 되는지 ‘이유’를 묻지 말고 내가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는 헛될 수 있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에는 패배한 이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266쪽). 역시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해설, 박혜진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유를 찾는 사람에게는 핑계와 자기 합리화의 노선을 선택하지만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이전과 다른 결단과 행동을 선택할 것이다. 이유는 논리적 설명으로 풀어낼 수 있지만 이해는 밑바닥 현실에 몸을 던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나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이 의중을 파고들어 근본적으로 알아내려고 노력하려는 안간힘이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올바른 이해는 이전과 다른 해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동일한 상황도 사람들의 이해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낳는다. 해석이 바뀌면 우리가 직면한 경제 빙하기의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solution)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해소(resolution)될 수는 있다. 해결은 과학적 판단의 문제로 100% 가능성을 가정하지만 해소는 합의를 통해 심리적 만족의 정도를 결정한다. 경제 빙하기 문제는 완벽한 해결될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경제 빙하기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다 보면 심각한 난국도 돌파하고 문제로 생긴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지금은 그래서 왜 내려가야 되는지 이유를 묻지 말고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바닥으로 내려가는 방향선택이 중요하다.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내려가서 절치부심 하다 보면 다시 솟구쳐 오를 생각도 잉태된다.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배한봉의 ‘육탁’이라는 시의 일부다. 어시장에서 생선이 바닥을 치는 모습을 목격한 시인이 마지막 몸부림치는 생선의 위력을 시적 상상력으로 담아냈다. 생선은 생의 마지막이라는 위기 감지와 함께 난생처음 맞이하는 물이 없는 바닥에 자기 몸이 닿는 순간, 가장 센 힘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한다.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김주대 시인이 ‘진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온몸에서 눈이 자라고 발이 자란다는 사실을 지금 생선은 눈앞에서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만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임을 이해한다. 아래로 떨어진, 그것도 잘 떨어진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위’를 오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27쪽).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 타기도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스로 넘어지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고 넘어서는 방법은 없다.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빨리 타는 매뉴얼은 존재해도 실제로 그대로 따라 한다고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로지 넘어지는 방법을 통해서만이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다. 자세를 가급적 낮추고 무게 중심을 잡는 요령을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
넘어져봐야 다시 일어서는 방법도 깨달을 수 있다.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져보며 옆으로 쓰러지는 경험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노하우를 지혜로 남겨준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 아주 무너지기 전에 우리는 여러 번 넘어져봐야 치명적인 실패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아이들도 여러 번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처절하게 무너져봐야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과 능력을 체득할 수 있다. 내려가서 넘어지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거기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고 배움이 있고 다시 일어설 방법과 용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넘어졌다 일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내공이 생긴다. 바닥을 치면서 생긴 힘이 축적될 때 더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차원이 다른 힘도 생긴다.
내려가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자 초보자의 마음이다
우린 그동안 모두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두 정상에 이르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앞만 달리던 ‘질주’가 ‘탈주’로 바뀌고 ‘탈주’는 이제 ‘탈선’의 운명에 직면했다. 올라가는 길에 성공이 기다리고 있고 부와 명예가 주어진다고 생각해 왔다. 먼저 올라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배웠다. 성취 중독증이며 ‘성’공만능주의에 ‘취’한 자들의 성공복음이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오르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으며, 위로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진 삶의 습관과 성향이 나도 모르게 악화일로를 걷게 만들었다. 우리 사고를 지배해온 언어도 속도와 효율, 목표와 성과라는 말이었다. 이제는 ‘엘리베이터’보다 ‘내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보’다 ‘내리컬레이터’를 타야 할 때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말도 맞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오르고 다시 오르려면 일단 내려와야 한다!” ‘오름’이 ‘옳음’을 동반하지 않을 때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고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지금은 내려가야 다시 비상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 있다. ‘내려가기’는 또 다른 ‘올라가기’다. ‘내려감’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도약의 서곡이다. ‘내려가기’는 스스로 바닥으로 향하는 ‘겸손한 마음’이자 ‘초보자의 마음’이다. ‘내려가기’는 근본(根本)과 기본(基本)을 다지기 위해 밑바닥에서 용틀임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내려가는 연습’은 ‘물리적 위치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심리적 위치이동’도 포함한다. 내려가는 연습은 올라가본 사람만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딘가에 비추어 보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도적 노력이다.
거울에 비추어 자기반성을 생활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점검해야 한다. 바다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절치부심한 다음 수증기로 변신하여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치다. 고 신영복 교수에 따르면 바다가 바다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받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바다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시련과 역경을 견뎌낼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다. 법(法)이라는 한자도 물 수(氵) 변에 멈출 거(去)자의 합성어다. 물이 멈추는 곳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이다. 세상의 이치와 자연의 순리가 들어있지 않은가. 아래로 내려가 멈춰야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法則)과 원리(原理)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삶의 가장 밑바닥이 인생을 새로 세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반이다. 실패가 제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줬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스가 하버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연설의 일부다. 바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최악의 조건이지만 삶의 거품을 걷어내고 내 이름 석자로 버틸 수 있는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나력은 자신을 수식하는 또는 수식했던 모든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자기 이름 석자로 버틸 수 있는 경쟁력이다. 나력은 성공가도를 달릴 때는 알아채지 못한다. 처절하게 망해본 사람, 가장 밑바닥에서 절치부심의 시기를 겪어본 사람만이 자기 몸에 아로새겨진 나력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비굴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힘없이 주저앉는 것이 아니다. 내려갈 수 있는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바닥에 가봐야 올라갈 수 있는 방향을 잡을 수 있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는 원점사고이자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는 초짜사고다. 지금 바닥을 흔들어야 나의 뿌리와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똑같은 힘을 위에서 가하면 무너지지 않지만 바닥을 흔들면 무너진다. 내가 근거하고 있는 바닥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면 밑바닥에 내려가서 내 삶의 존재기반을 흔들어봐야 한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바닥’은 ‘신념’이다. ‘신념’을 흔들어야 사람이 바뀐다. 관념은 머리에서 자라지만 신념은 삶의 밑바닥에서 경험한 교훈을 토대로 자란다. 그 신념도 자주 흔들어봐야 허공에 매달린 관념이 아닌지를 구분해낼 수 있다.
싸움소는 머리를 상대 소보다 최대한 낮춰야 이길 수 있다. 진짜 고수는 이기기 위해 자세를 먼저 낮추고 아래로 내려간다. 거기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고 상대의 허점을 간파한다. 씨름선수도 상대선수보다 몸을 최대한 낮추는 이유다. 자세를 높일수록 상대방의 공격에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수동적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웅크리고 위축되지 말고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적극적으로 납작 엎드려야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끊임없이 낮춘 자세는 기회를 잡고 무섭게 파고들 수 있는 튼실한 기반이 된다. 낮추면 기회가 보인다. 지금은 성장에서 성숙으로 지향할 때다. 성장은 완성된 목표를 향한 일사 분란한 행진곡을 지향하지만 성숙은 끊임없이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오늘보다 다른 내일의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미완성의 교향곡이나 변주곡을 지향한다.
“개울바닥에 돌이 없다면 시냇물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칼 퍼킨스의 말이다. 개울 바닥이 돌에 부딪친 시냇물만이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노래를 부를 수 있다.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이 알 수 없는 밑바닥 진실은 바닥을 기어본 사람만이 몸으로 감지할 수 있다. 몸으로 감지한 감각적 경험과 깨달음은 깊은 사유의 시간을 통해 숙성되어 간다. 거기서 성장일변도로 달려간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성숙한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울퉁불퉁한 밑바닥을 훑고 살아가는 시냇물에게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다양한 인생의 주름이 있다. 그 주름에 시냇물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값이 고스란히 새겨진다.
세월의 주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철학자 들뢰즈는 이런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내 몸에 생기는 다양한 주름을 다중체(multiplicity)라고 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 다중체다. 다중체는 인생의 시기별로 그 색깔과 모습이 다양하다. 내리막 길을 많이 걸었던 인생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에서 성공했던 즐거운 체험이 많았던 시기가 있는 법이다. 어쨌든 사람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통해 생기는 다중체가 나의 정체성의 씨앗으로 자리 잡는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은 ‘주름’이 되는 이유다.
박지성이라는 이름은 운동장에서 축구하면서 생긴 주름이 있고, 박태환은 수영장에서 물살을 가르며 수영하면서 생긴 주름을 갖고 있다. 김연아는 스케이트 장에서 무수히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긴 얼룩과 무늬가 주름으로 축적되어 있고, 안산 양궁 선수는 활시위를 무수히 당기면서 날아가는 화살을 정조준하는 주름이 온몸에 아로새겨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주름이 그 사람의 이름값을 한다. 박지성에게는 축구하는 다중체가 생겼고 박태환에게는 수영하는 다중체가 생겼다. 박지성과 박태환의 주름은 그동안 자신들이 노력하는 무대 위에서 씨름한 정도만큼 생긴다. 박지성에게 수영하는 주름은 없고, 박태환에게 축구하는 주름은 없다. 김연아에게는 얼음 위에서 연기하는 주름이 생겼고 안산에게 양궁 하는 주름이 생겼다.
저마다의 다양체가 저마다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정체성으로 형성된다. 사람은 구겨진 종이와 같다 주름은 마치 구겨진 종이와 같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삶이 많이 구겨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바깥의 뜻하지 않는 힘에 굴복당할 때도 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장애물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겹겹이 쌓이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 몸에 얼룩으로 남는다. 종이가 많이 구겨질수록 정석대로 접은 비행기보다 멀리 날아간다. 우여곡절이 많은 구겨진 종이일수록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똑바로 접은 비행기는 내 마음대로 날릴 수 없지만 종이를 구겨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방향대로 멀리 날아간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주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살아간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다
그만큼 세상의 흐름을 타고 나의 주체적 의지대로 험난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력(耐力)이 생긴다. 힘든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몸에 생긴 주름이 안으로 굽어지면서 그 안에 내가 겪은 숱한 삶의 애환이 사연으로 쌓인다. 주름이 안으로 생겨서 의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함축된다. 그게 바로 시사점(implication)이나 암시(暗示)다. 주름(pli)이 안(im)으로 생겨서 내포되거나 함축된 의미, 즉 함의(含意)다. 반대로 그 주름의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의미를 따져보는 게 설명(explication)이다. 주름이 안으로 접히면서 의미를 품고 있는 시사점이나 그 주름을 펼쳐보면서 주름에 내포된 의미를 따져보는 설명은 모두 한 사람이 이름값을 하면서 만들어온 주름의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행위다. 안으로 품고 있는 주름의 시사점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과 ‘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 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 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내가 겪은 모든 주름의 흔적은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용오름처럼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기류를 타며 자기 존재를 ‘아름’ 답게 드러냄으로써 한 편의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필름’으로 남기기도 한다. 열심히 매진하고 몰입하다가도 갑자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어서 거들먹거리는 시간도 많을 때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뭔가를 갈구하다가도 수단과 목적이 구분되지 않고, 뭐가 뭔지 혼돈스러울 때 ‘푸르스름’하거나 ‘누르스름’하며 ‘거무스름’하게 인생이 흑백논리나 양자택일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하나의 잣대로 ‘판가름’ 하기 어려운 경우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게 보여도 내면으로 축적한 인생의 ‘주름’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 다운 사람이 많다. 이런 모든 직간접적인 경험의 축적이 ‘주름’으로 생기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최승자 시인의 ‘20년 후 지(芝)에게’라는 시의 일부다. 삶의 모든 순간이 아슬아슬하다. 힘껏 달려가봤지만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방금 출발했고, 계단을 미친 듯이 내려갔는데 지하철이 막 도착해서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마감시간이 다가오지만 아직 갈길이 멀 때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다 갑자기 복잡한 실타래가 풀리듯 막혔던 아이디어가 뻥 뚫리면서 아슬아슬하게 마감시간을 지킬 수 있었던 원고나 보고서도 많았다. 느닷없이 바람이 세차게 분다. 쓰고 있던 모자를 간신히 잡아 손에 든다. 하마터면 바람에 날려 버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내려다만 봐도 아찔한 출렁다리, 건너기도 전에 현기증이 온다. 눈 딱 감고 한 발자국 옮기기 시작한다. 다음 발자국이 알아서 따라온다. 출렁이는 다리에 몸을 맡긴 채 다시는 건너고 싶지 않은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왔다. 인생다반사가 다 이렇다.
삶은 ‘우두커니’와 ‘멍하니’가 만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와락’ 눈물을 쏟는 과정이다
권대웅 시인의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는 시가 있다. 평범한 언어가 시인의 상상력을 통과하면 비범한 단어,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회생한다.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견뎠던 그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지나간 겨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힘든 시기를 멍하니 쳐다보다 이미 떠나가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세상이 바뀌는 조짐을 봄이 되고서야 느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다는 경이로운 기적에 와락 눈물을 쏟는다. 평범한 단어 몇 개로 인생사를 관통하며 느끼는 감정을 조용히 일깨우다 마지막 순간에 쏟아지는 감동을 ‘와락으로 표현한다.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멍하니 쳐다보다 얼어죽을 수 있다. 더욱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보여준 이상 징후나 조짐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며 과거의 추억에 젖거나 회상에 물들다 빠져나올 수 없는 크레바스로 추락할 수 있다. 문득 찾아온 경제 빙하기를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멍하니 바라만 보지 말고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바닥으로 내려가 지나온 시절을 잠시라도 물끄러미 생각하며 주어진 삶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따듯한 희망의 체온을 나누면서 혹한기를 극복해내는 펭귄의 연대처럼 우리는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와락 눈물을 쏟으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건 어떨까.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믿음, 모든 눈은 반드시 녹고 모든 비는 반드시 그친다는 믿음, 그리고 이빨은 빠져 봄은 동의하지 않아도 온다는 믿음이 힘들지만 오늘을 살게 만드는 희망의 파수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