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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름 없는 소름입니다

당신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름 없는 소름입니다



당신은

추운 겨울에도 멈추지 않고

한파 속에서 겪은

전쟁 같은 삶의 회로애락을 잊지 않고

자신의 몸속으로 새겨 넣어

아직도 연주되기만을 기다리는

무심한 가을밤의 세레나데이며

난중일기 같은 나이테입니다


누군가는 그 곁에서

한 많은 세월을 울음 속에 간직하며

사리사욕은 다 버리고 벼르는

때를 기다리며 절치부심하는 부싯돌이며

사리(事理)를 깨달으며

사리(舍利)를 품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는 수줍은 고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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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눈발이 휘날리는 어둠 속에서도

얼음 밑을 흐르며 휘어지고 넘어는

한 많은 시냇물이며

달빛 연가를 돌부리에 부딪혀

지나온 내리막길을 연주하며

시인의 목을 축여주는

속 깊은 마중물입니다.


누군가는

시냇물 위를 걸어가며

마음이 품은 열기를

허공으로 내보내는 아늑한 아지랑이자

그리움에 젖어 새봄을 기다리는

철부지 귀뚜라미의 애처로운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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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처 없이 아래로 뻗어나가며

침묵으로 항변하는 근거 없는 아우성이며

땅속 여행을 멈추지 않고 깊이 파고드는

뿌리칠 수 없는 뿌리의 고뇌입니다


누군가는

늙어가는 그림자를 벗 삼아

그리움에 파묻혀야 비로소 스며드는

은근한 봉숭아 꽃잎이며

세파에 물들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눈물겨운 이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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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해가 중천에 떠도

서둘러 깨지 않는 슬픔의 무게이자

목적지조차 알리지 않고

탕진했던 시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허공을 무대로 춤을 추는 진눈깨비입니다


누군가는

사납게 달려오는 눈보라를

보랏빛 그리움에 녹여 다독거리는

가없는 책 속의 한 마디 위로이자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머뭇거리는 사무친 눈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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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밤잠을 설치며 적막을 깨우는

엎치락뒤치락 이불소리이자

생각의 실마리를 붙잡고

한 순간이라도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장식하려는 죽어가는 볼펜의 몸부림입니다


누군가는

볼펜의 대책 없는 화풀이와

끝을 모르고 휘둘러대는 앙갚음의 온도이며

격렬한 몸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꺼이 감정의 씨앗으로 키워내는

구겨진 종이의 시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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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잡음이 치유되어 소음으로 들리고

허영이 변신해서 슬픈 번영을 꿈꾸는

낮은 굴뚝의 끊이지 않는 연기이자

남루한 인생이어도 나무라지 않고

언제나 두 팔 벌려 안아주는

구름 같은 벌판입니다


누군가는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아

뿌리를 뒤흔들어 깨우며

땅과의 애틋한 인연을 이어가는

잠들지 않는 땅거미이고

맑은 날 허공에게도 꿈 이야기를 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숨소리이자 빗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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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루의 빛깔을 완성하기 위해

햇빛을 흡수해 자기 색깔을 만드는

불타는 채송화이자

지나가는 경적 소리도 귀담아듣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쉰소리를 내는

떨어지다 상처받은 빗방울의 하소연입니다


누군가는

잔가지에 맺힌 찬 서리가

순식간에 사라질 풍경을 부여잡고

사방팔방에서 소리치는 아쟁소리이자

햇볕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얼어붙은 몸을 부여잡고

속절없이 토해내는 새벽녘의 자기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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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폭풍우가 몰아쳐도 가슴을 끌어안고

멀건 대낮이 괴롭혀도

깊은 뜻을 드러내지 않는

번개 맞은 소낙비이자

혹한이 몸을 얼어붙게 해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지워지지 않는 암각화입니다


누군가는

앞서간 사람의 눈길이

가슴을 관통하며 아로새겨진

불안한 눈빛의 흔적이며

작은 바람의 몸짓에도 사라지는

모래사장에 새겨진 서글픈 발자국이자

애처로운 나뭇잎의 연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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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수심에 사로잡힌 위태로운 고드름이며

짓눌린 세월의 무게도

아랑곳없이 견뎌내는 서까래이자

사는 게 못마땅해도 쉬지 않고 밀려와서

서러움을 토해내는 알 수 없는 파도소리입니다


누군가는

속마음이 들킬까 봐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도

은박지에 쌓인 채

침묵을 지키며 익어가는 군고구마이고

식어가는 마음을 달궈줄 온돌방이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도

여전히 파도의 파장을 받아주는 바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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