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동안 올라가본 산이다. 천미터급 한라산부터 오천미터급 킬리만자로까지 트레킹을 하거나 등반여행으로 다녀봤다. 산을 정복 대상으로 삼는 ‘등산(登山)’보다 나와 혼연일체가 되는 ‘입산(入山)’의 친구로 다가갔다. 그 속에서 겪은 뼈아픈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뼈아픈 깨우침을 준다. 혼자서는 깨우칠 수 없는 소중한 교훈, 모든 등반은 동반이다.
산은 올라가면 시계를 봐야 하지만 사막은 횡단하며 나침반을 봐야 한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지점까지 올라가야 하는 산과는 다르게 사막은 속도보다 방향설정이 중요하다. 인생 전반전을 달려온 서툰 오십이 될 지음, 서두르는 나의 또 다른 오십에게 어떤 삶을 선물로 줄까 고민하다 사하라사막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했다.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은지 책상에 앉아서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만 상념의 파편이 들락날락할 뿐 뚜렷한 대안도 분명한 계획도 따오르지 않았다. 오리무중한 오십 후반의 삶을 구상하기 위해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2012년 6박 7일 동안 사하라 사막에서 250Km를 달리는 울트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하루에 40Km를 아침 7시에 출발, 저녁 7시 전에 들어오는 레이스를 6박 7일 동안 펼치는 난코스다. 낮에는 4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출발은 동료들과 같이 하지만 결국 레이스를 펼치는 주체는 서두르는 오십과 사막 사이에서 포기와 완주를 고심하는 어설픈 오십이다. 사막을 홀로 건너는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사막에게 물어보았다. 왜 인생은 사막인지. 사막이 나에게 답을 주었다.
인생 1막은 매일 40Km 출발선상에서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서막’이다. 서막은 한 번만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서막은 계속된다. 2막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적막’이다. 사막을 홀로 달리다보면 사막에는 어느 새 어둠이 깔리면서 ‘적막’해진다. 적막이 바로 인생 3막이다. 마지막 4막은 사막에도 ‘주막’이 있다. 여기서 ‘주막’은 지친 사람에게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다. 사막이 나에게 가르쳐준 깨달음은 다른 게 아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의 ‘서막’이 존재하고, 가도 가도 ‘막막’하지만 하루를 정리하는 ‘적막’한 밤과 함께 수고한 나를 위해 한 잔의 술로 피로를 잊게 해주는 ‘주막’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 절반을 살아온 내가 사막에서 깨달은 절박한 진실은 바로 인생은 언제나 사막(四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막(沙漠)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오십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넘어 오십 전반전을 달려온 사람에게 오십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탐색과 사색의 문으로 안내하는 처방전이기도 하다. 먼저 건강 백세를 진단하는 오십지수 진단지로 나의 상태를 파악한다. 진단지는 몸, 공부, 언어, 인간관계, 행복이라는 인생 후반전에 특히 중요한 5개 분야로 구성, 오십 이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절반으로 줄여야 할 습관과 두 배로 늘려야 할 습관 50개를 제시한다. 내가 어디가 취약한지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처방전을 책에 가득 마련했다. 인생 전반전에 만나지 못했던 ‘진정한 나’를 만나고, 내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오십이 키워야 되는 한 마리의 ‘게’가 있다
바로 (나)답게다. 내가 하면 재미있는 능력, 재능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아낼 수 있다. 다리가 떨리지 않고 심장 뛰는 일을 찾아 재미있게 하다보면 의미가 생기는 일이 나답게 살아가는 일이다. 남보다 잘하기보다 전보가 잘하려는 애쓰기가 나다운 필살기를 낳는다.
‘밤’은 험상궂은 ‘밤송이’ 안에 있다. ‘알밤’은 ‘밤톨’ 껍질 안에 숨어 있다. ‘밤톨’ 껍질을 벗겨내야 ‘보늬’로 뒤덮인 ‘알밤을 만날 수 있고, ‘알밤’을 둘러싸고 있는 ‘보늬’를 벗겨내야 비로소 하얀 속살의 ‘알밤’을 만난다. 밤의 존재와 만나는 길, 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걸 벗겨내야 만난다. 지금 내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형용사의 거품을 벗겨내야 이름 석자로 만날 수 있는 진정한 나와 만날 수 있다. 벗어야 벗어날 수 있다. 과감하게 처절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나의 껍데기를 벗겨낼 때 참나, 나(裸)가 드러난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가 아니라 유영만이라는 이름 석자로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진정한 나의 힘, 나력(裸力, Naked Strenght)이다. ‘나’는 ‘나(裸)’다.
진정한 나를 만나는 한 가지 방법은 관성대로 살아가는 삶, 타성에 젖어 살아온 삶, 원심력 대로 살아가려는 욕망의 끈을 끊고 각성과 탄성이 인도하는 삶, 구심력으로 자기 존재를 지키려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이 끌고 가는 삶,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는 원심력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하면 몰입하는 힘이 생기는 일, 나를 끌어당기게 만드는 구심력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때가 바로 오십이다. 원심력이 끌고가는 삶에 벗어나 구심력이 이끄는 진정한 나를 만나는 삶을 위한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십(五十)까지 원심력에 끌려가던 ‘나(吾)’에서 벗어나 구심력으로 자기답게 살아가는 진정한 ‘나(悟)’를 만나려면 새로운 삶의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절반의 철학’이다. 절반(1/2)으로 줄이고, 두(2) 배로 늘리면 대체 불가능한 유일(1)한 내가 된다는 철학이다.
절반으로 줄이지 않고 전반전처럼 살아가면 나는 주인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인생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다보니까 삶의 습관으로 고착화된 일을 반복하는 삶은 노예의 인생, 손님의 인생이다. 후반전에 두 배로 늘려야 하는 일은 대부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마음껏 누리는 자유와 관련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게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어제와 다른 생각과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진짜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꿈꾸던 일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바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사랑하려면 내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앞으로 살아갈 오십은 내 삶의 주인으로 재탄생하는 인생 후반전이다.
‘절반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주장이나 관념적 진술이 아니라 삶의 밑바닥에서 건져올린 성찰의 거울이자 파란만장한 삶이 선물로 주고간 파란문장이다. ‘절반의 철학’은 우여곡절의 삶과 시행착오가 남기고 간 얼룩이 판단착오를 줄이는 깨달음의 무늬로 직조된 실천적 지침이자 구체적인 처방전이다. ‘오십’은 ‘오어(또는, or)’, 즉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나이가 아니다. 건강 100세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절반으로 줄이고, 두 배로 늘려야할 오십가지 항목을 둘 다 실천하는 양단불락(兩端不落)의 나이다. 양단불락은 두 극단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또는(or)’세계가 아니라 양극단을 하나로 끌어아는 그리고(AND)의 세계다. 오십의 끝(End)에서 또 다른 끝(End)을 끝없이 만나서 연결되는 그리고(AND)의 삶이 오십이다. 절반의 끝(End)에서 두 배로 늘리는 삶과 연결되어(AND) 이전과 다른 행복한 끝맺음(End)이 일어나는 삶이 바로 오십이 추구하고 지향해야 될 삶이다. 여러분을 오십 끝(End)에서 또 다른 오십이 시작되는 ‘끄트머리’의 세계로 초대한다.
앞으로 '오십 후반전이 인생 반전이다'에 소개될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5가지 범주에 각각 10개의 소주제다. 총 50가지를 절반으로 줄이고 두 배로 늘리면 건강 100세 보장된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