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임’의 크기가 ‘쓰임’의 크기를 결정한다
인생 후반전에서 일생 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이 필요한 까닭은?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 누구나 50이 된다. “40대부터 인생 이모작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지겹게 들었다. 전반전은 비록 남을 위해 살아왔지만 후반전만이라도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낡은 몸과 마음 그대로의 나’에 머물러 있다.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제2의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맞이한 또는 곧 맞이할 50이라는 숫자는 늘 무겁게 막연하게 느끼는 나이다. 나이는 나 이제부터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인데, 나는 언제부터 나를 깨닫는 각성과 결단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신통치 않은 성적표뿐 아니라 살아온 날만큼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감이 그저 감당되지 않는 게 문제다. 진정한 담당자는 주어진 인생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나는 과연 오십 후반전을 감당할 능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제없는 인생이 문제라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다고 다가오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리 만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해야겠다. “견해는 언젠가 진부해지지만, 사실은 영원히 진부해지지 않는다”는 아이작 싱어(Isaac Bashevis Singer)의 말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은 현실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서의 삶이 양산하는 산물이다. 사실은 오로지 사실이 거주하는 현장에 몸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는 진실의 재료다. 100세 시대 삶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견해는 내 몸을 관통하며 남긴 흔적 얼룩이 번역된 언어가 아니다. 당연히 와닿지 않고 자주 듣다 보니 남의 이야기처럼 진부하게 들릴 뿐이다. 그런데 몸이나 정신은 전처럼 팔팔하지 않고 문제는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살아간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날은 더 길고, 지금까지 투자한 돈보다 앞으로 들어갈 돈도 더 많은데 언제까지 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은 엄연한 현실이자 사실이다. 내 인생 2분의 1, 50세 이후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현실에는 엄연한 ‘사실’이 꽈리를 틀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 전후반을 나누는 삶의 반환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 따르면 오십 세는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 지천명이다. 30세에 뜻을 세우는 이립(而立)을 지나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불혹(不惑)의 40세를 넘겼어도 여전히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더 많아지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십 세의 오(五)는 나를 의미하는 오(吾)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까지 남을 위해서 힘들게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나(悟) 답게 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오십이다. 단순한 숫자 오(五)가 나를 의미하는 오(吾)로 바뀌고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오(悟)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이 오십이 되면서 자유로운 나로 거듭나는 진정한 변신과정이다. 오리무중(五里霧中)했던 삶을 오색찬란(五色燦爛) 빛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마지못해서 하던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 하지 않던 또는 하던 일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나의 ‘코나투스’나 ‘힘에의 의지’를 떨어뜨리는 일은 아예 끊어버리거나 절반으로 줄이고 나를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일은 두 배로 늘리는 것이다.
절반의 철학이 필요한 네 가지 이유
절반의 철학은 인생 후반전에 일생 반전을 노린다. 절반의 철학은 인생 후반전에 나침반이 가리키는 진북을 향해 목적의식과 소명을 갖고 진군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절반의 철학은 본분을 다하는 삶을 지원하는 철학적 기반이다. 마지막으로 절반의 철학은 줄임이 쓰임을 결정한다는 삶의 철학을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권장하려는 의지를 천명한다.
인생 후반전이 일생 반전이다
인생의 초반을 잘 못 시작했어도 우리는 그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끄트머리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끝에 머리, 즉 시작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말이다. 모든 끝(End)에서 또 다른 시작이 이어진다(AND). ‘End’와 ‘End’ 사이에 언제나 ‘AND’가 살아간다. 끝과 끝 사이에 그 끝을 이어주는 접속사 그리고(AND)에는 언제나 인생 반전을 꿈꾸는 절치부심이 살아간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섰어도 만반의 준비로 반전을 시도하면 인생 후반전이나 종반전에도 얼마든지 인생 역전 드라마를 쓸 수 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진지한 실천을 반복하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시작된다. 반전을 꿈꾸려면 우선 몸집을 가볍게 해야 된다. 그것이 바로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다. 후반전에 반전을 노리는 사람은 우선 절반의 철학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절반’ 속에 ‘나침반’이 살아간다
절반을 줄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인생의 나침반이 보이고, 두 배로 늘리면 무엇을 숭배하며 살아야 할지 인생의 보배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을 보면서 앞만 보고 달리던 시계 중심의 인생은 절반으로 줄이고 내가 어디로 가면 행복한지 인생의 방향을 잡아야 내가 하면 행복한 일도 잡을 수 있다. 내가 하면 행복한 일은 얼마나 빠른 시간에 일을 하고 있는지 시계가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꿈꾸는 설렘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나침반이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다. 나침반은 우선 하던 일을 줄이라고 속삭인다. 줄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늘려가면 늘어지는 인생을 살 수 있어도 늘 행복한 삶은 만끽할 수 없다. 절반 속에 살아가는 나침반을 찾기 위해서는 그동안 마지못해서 늘 해오던 습관과 관습의 틀을 벗어던지고 나에게 의미와 가치를 주지 않거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모든 일들은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한다. 끊기 없는 끈기는 삶의 위기를 불러온다.
분(分)에 넘치면 본분(本分)을 다 할 수 없다
절반으로 줄여야 하고 있는 일의 가치가 갑절 늘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일의 의미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면서 삶의 활력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절반으로 줄이지 않으면 내 인생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위반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심각한 배반이다. 절반으로 줄이지 않고 하던 일을 두 배로 늘리기만 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율배반(二律背反)일 수 있다. 절반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실천하면서 깨달은 삶의 노하우를 십시일반(十匙一飯)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기 시작하면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피차일반(彼此一般)의 친구이자 희망을 연대를 같이 만들어가는 인생의 도반임을 알 수 있다. 절반의 철학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 절반으로 줄일 것을 먼저 선정한 다음 나머지 인생을 만끽함으로써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은 두 배로 늘릴 것을 제안한다.
‘줄임’의 크기가 ‘쓰임’의 크기를 결정한다
나의 쓰임을 알아내려면 하던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 안 하던 일을 두 배로 늘려봐야 한다. 몸이 개입되는 체험적 산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는 신체적 각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절반으로 줄이기만 해도 내 삶의 다른 쓰임새가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절반으로 줄이지 않으면 내가 무슨 일을 하면 행복한지를 알아내기 어렵다. 절반으로 줄여야 인생의 동반자를 만날 수 있고 두 배로 늘려야 삶의 축배를 들 수 있는 축제를 즐길 수 있다. 절반으로 줄여야 인생 후반전이 행복해지고 종반전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안 하던 일 또는 내가 하면 가치 있고 행복해지는 일은 두 배로 늘려야 삶의 축배를 올릴 수 있고, 지금보다 백배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두 배로 더 늘리지 않으면 인생의 고배를 마실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
절반의 철학을 실천하면서 인생 후반전을 일생 반전으로 만들고 싶은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십 이후는 ‘하던 일을 반으로 줄이고, 하고 있거나 안 하던 일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 세상에 단 하나(1)밖에 없는 유일한 내가 되는 비결은 하던 일을 절반(1/2)으로 줄이고, 하고 있거나 안 하던 일을 두(2) 배로 늘리는 노력을 반복한다. 절반으로 줄이면(÷2) 인생 후반전이 행복해지고 종반전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두 배로 늘리면(×2) 지금보다 백배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이분의 일(1/2)이 이(2)를 만나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1)한 ‘나’, 소중한 나가 된다. 나누기와 곱하기만 잘하면 성공하는 오십이 될 수 있다! 이걸 간단한 공식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1/2(절반) x 2(두 배) = 1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
끊기 없는 끈기는 중년의 삶에 위기를 불러온다. 마지못해 늘 해오던 습관과 관습을 벗어던지고, 나에게 의미와 가치를 주지 않거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모든 일들은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한다. 그러면 두 배 늘려야 할 것들이 보인다. 이 놀라운 마법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불운’하지만 ‘불행’ 하지 않다
불운은 운이 좋지 않다는 뜻이고, 불행은 행복하지 않은 극단의 상태를 말한다. 내가 불운하다는 이야기는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운이 나쁘다는 말이다. 불운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사건을 지칭하지만 불행은 벌어진 일에 대한 나의 의미부여나 해석의 결과 생기는 감정상태다. 그렇다면 한 가지 드는 의문은 피할 수 없는 불운한 사건은 모두 불행한가이다.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고 생각하면 차이가 뚜렷해질 것 같습니다. 휴식 중에 창고가 무너진 것은 불운이지만, 그 일을 자신의 인생에서 어느 자리에 둘 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변합니다. 불행으로도, 웃긴 일화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둘 수 있지요. 그러니 불운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점)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불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입니다”(139쪽).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 나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불운했지만 불운한 사건을 감당한 사람의 해석결과에 따라 불행할 수도 있고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상은 불확실성을 품고 예측불허의 사건이나 사고로 점철된다. 내 마음대로 풀리는 일보다 예기치 못한 변수로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불운은 나의 힘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예측불허의 사고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事故)’를 당했지만 그 사고를 통해 나의 ‘사고(思考)’가 바뀌는 것은 사고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나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다. 불운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고(事故)’지만 내가 겪은 사고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행복한 ‘사건’으로 거듭날 수 있다. 불운은 앉아서 당하는 ‘사고’지만 뭔가 의지를 갖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 ‘사고(事故)’는 얼마든지 ‘사고(思考)’를 반전시키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뜻밖의 악재가 겹치면서 의도하는 일이 거의 실행되지 못하고 불운한 ‘사고’가 설상가상으로 겹칠 때, 잠시 숨을 가다듬고 불운한 사고가 나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우여곡절의 삶이었고 시행착오가 줄을 이어 발생했던 오십 전반전의 삶이라고 해도 후반전에는 판단착오가 줄어들고 파란만장한 삶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전반전을 살았던 삶의 이력(履歷)이 후반전의 경력(經歷)을 만드는 원동력(原動力)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래를 앞당겨 예측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미래를 점을 봐서 알아내려고 하기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 축적한 직간접적인 모든 경험의 점(點)을 연결해서 생긴 선(線)을 그리다 보면 내 삶의 면모(面貌)가 드러날 것이다. 시간의 깊이와 넓이의 ‘점’이 희로애락을 겪으며 저마다의 인생 ‘곡선’을 만들고, 파란만장한 곡선의 여정이 결국 한 사람의 ‘면모’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오십 후반전의 삶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져 어제와 다른 우연이라는 선물을 만나는 여행이다. 어떤 우연이 나와 마주칠지 예측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어제와 다른 앎이 생긴다는 점이다. “믿어야 앎이 생긴다”는 마이클 폴라니의 말처럼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다리를 건너는 행동이 따른다. 마찬가지로 오십 후반전의 미래가 새로운 우연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어야 어제와 다른 시작을 만날 수 있다. 한 번도 시작해보지 않은 출발의 설렘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선물과 마주치게 만들어준다. 하던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 아예 하지 않거나 하고 있던 일을 두 배로 늘리는 일 자체가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설레는 미래를 맞이하겠다는 다짐이자 기대다. 절반으로 줄이고 두 배로 늘리는 그 생각과 행동 사이에서 이제껏 만나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아름다운 순간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