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은 물어보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오호라! 나는 오늘에서야 우리 공자를 이해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따라 짖지는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난쟁이가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243쪽).” 이지(李贄)의 《속 분서(焚書)》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50세가 되면 안다는 공자의 지천명(知天命)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우리는 오십을 맞이한다. 우리 역시 남의 인생을 사느냐고 정신없이 달려간다. 정신 나간 사람에서 정신 차린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전반전 인생과 뭔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남의 인생을 쫓아 열심히 벤치마킹(benchmarking)을 했지만 지금부터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는 패스 브레이킹(path breaking)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남보다 빠르게 살아가려고 했다면 지금부터는 전보다 이르게 살아가야 한다. ‘빠르게’는 속도전이지만 ‘이르게’는 의미전쟁이다. ‘빠른’ 사람은 효율을 추구하지만 ‘이른’ 사람은 효과를 추구한다. 효율은 정해진 길을 적은 입력을 투입,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지만, 효과는 정해지지 않은 길을 걸어가더라도 보다 의미 있는 성취를 내려고 노력한다. ‘성과’는 결과 중심 사고의 산물이지만 ‘성취’는 과정 중심의 부산물이다. 빨리 목표를 달성해서 높은 성과를 만들어냈지만 성취감은 느끼지 못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이 하던 방식을 열심히 쫓아가서 목표는 달성했지만 내 인생의 전정한 목적은 무엇인지, 나는 남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속에서 나의 관점과 시각으로 해석한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욕망을 쫓아 선망(羨望)하는 삶은 다 망한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깨닫지 않으면 오십 후반의 인생은 더욱 절망적이다. 선망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남을 향하면서 그들의 성과와 비교하면서 발생하는 잘 못된 욕망이다. 지금까지는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멈추고 안으로 향하면서 선망 대신에 희망을 품기 시작하자. 선망은 경쟁심을 부추기지만 희망은 경쟁력을 부채질한다. 지금까지 남과 비교해서 조목조목 따지는 삶을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는 자신의 내면을 다지면서 나를 중심에 두고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시점이다. 지금까지는 스케일이 큰 꿈도 꾸고 총론이 좋으면 찬성하는 추상적인 의미를 추구했지만 지금부터는 스케일보다는 디테일, 총론보다는 각론, 추상명사를 보통명사가 살아가는 동사의 삶으로 바꿔 살아갈 시점이다.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가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이제 고생 끝에 통증밖에 오지 않는다는 고진통래(苦盡痛來)로 바꿔야 한다. 몸은 ‘여기’ 있으면서 마음은 아직 오지 않은 ‘저기’로 향하는 삶을 살아온 오십 전후의 사람들에게 “인생 후반전이 반전”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서 통념을 먹고 푸념하면서 체념하기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이로운 세계를 심장 뛰는 마음으로 맞이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지금까지 남의 인생을 살기 위해 남이 정해놓은 규칙과 법에 맞춰 살아온 누추한 삶은 우선 버려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삶의 주인공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이질적인 두 가지를 엮어내는 유추(類推)를 통해 경탄에 마지않는 경이로운 기적이 일상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찾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사회가 요구하고 조직이 원하는 사람, 집의 가장에게 덧씌워진 의무 이행자로 살아왔다. 지금부터는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저축하는 사람이 아니라 추억을 만들기 위해 경험을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5가지 조건을 이야기한다. 일명 오성급 성공 모델이다. 여기에는 체력으로 단련하는 야성, 지능을 능가하는 지성, 감동과 감탄의 원천인 감성, 심장 뛰는 비전의 언어를 만드는 탄성, 마지막으로 믿을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정성이 포함된다.
“가을은 모든 나뭇잎에 꽃이 피는 제2의 봄이다.” 알베르 까뮈의 명언이다. 이걸 중년의 삶에 대입해서 바꿔 쓰면 더 멋진 명언이 탄생된다. “중년은 모든 역경이 경력이 되는 제2의 봄이다.”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드는 중년은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제2의 봄이다. 다만 그 봄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다가가는 선물이다.
❶야성(체력과 건강): 건강한 후반전을 위한 상쾌한 몸 처방전
신체성이 정체성은 물론 미래 가능성을 결정한다.
운동하는 동안은 동안(童顔)이다
야성(野性)은 야생성(野生性)의 줄임말이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쓴 책, 야생의 마인드(Savage Mind)가 바로 과학적 사고와 대조되는 길들여지지 않은 사유를 지칭한다. 야성은 야생에서 야전을 통해 길러진다. 야성은 한 마디로 몸으로 체득한 자기 정체성이자 미래 가능성이다. 나를 바꾸는 방법은 내 몸을 바꾸는 것이다. 몸으로 야생 체험을 통해 닦은 야생성이 나의 자생력을 결정하는 원동력이다. 오십을 넘기면서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오십 후반의 인생은 체념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몸이 건강해야 기분이 상쾌해진다. 상쾌하지 않으면 머리도 명쾌해지지 않고 마음 역시 유쾌하지 않으며 꿈을 쫓아가는 여정이 통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의미를 제공해 주는 그 어떤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평소 운동을 주기적으로 하면서 근력을 키우는 사람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근성을 지니고 있어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끈기’를 발휘하며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하며 살아간다. 야성지수가 높은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난국이 다가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정면 도전해서 극복해 보려는 높은 기상과 극기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 끈기로 극기하는 사람은 굵직굵직한 사안이 의사결정을 기다려도 흔들림 없이 ‘강직’하게 처리하면서 결연한 결행을 감행하는 사람이다. 오십 후반에 운동으로 몸을 단련해야 되는 중요한 이유는 무기력해지지 않고 오십 후반을 더욱더 ‘열심’히 살면서 열정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해서다. 그래야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사건과 사고가 터져도 ‘끈기’를 발휘해서 ‘극기’할 수 있다. 이들은 평소 운동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고 혈기왕성(血氣旺盛)하게 살아간다.
야성으로 어제와 다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계에 도전하면서 우연한 ‘마주침’을 즐기는 사람이다. 마주침이 없다는 이야기는 현실에 안주하며 산다는 반증이다. 낯선 환경과의 체험적 마주침, 낯선 사람과의 인간적 마주침, 낯선 책과의 지적 마주침이 책상에 배울 수 없는 길들여지지 않는 사유, 야성을 기르는 3대 원천이다. 야성을 지향하는 사람은 몸으로 감각을 익혀 ‘체감’이나 ‘실감’이 뛰어난 사람이며 남다르게 ‘시야(視野)’가 넓다. 내 몸을 관통한 체감이나 실감이 부족하면 책상에서 머리로 이해는 가능하나 야생에서 몸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실종되기 시작한다.
❷지성(지력과 배움): 낡은 나로부터 벗어나는 명쾌한 공부 처방전
지성(智性)은 지능을 능가하는 지혜의 원천이다.
배우는 사람이 인생의 주연 배우다
지성은 낡아빠지는 생각을 익은 생각으로 창조하는 각성제다. 늙어가는 몸은 어쩔 수 없지만 낡아 빠져 가는 생각은 어쩔 수 있다. 낡은 생각을 날조하는 꼰대, 입력은 고장 났는데 출력만 살아있는 꼰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익은 생각을 창조하는 리더로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이런 지성은 야성을 통해 개발될 때 지루한 관성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야성 없는 지성은 지루하고 지성 없는 야성은 야만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유다. 오십 후반에 일정한 주제를 잡아서 비교적 오랫동안 공부를 통해 지성을 연마할수록 생각은 어제와 다른 각성을 통해 색다른 통찰을 잉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지혜와 한 가지를 물어보면 열 가지 가능성을 모색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을 삶의 덕목으로 살아간다.
다양한 도전과 시도, 실험과 모색을 통해 지성을 지속적으로 단련하는 사람은 삶의 지혜가 풍부해서 위기도 ‘슬기’롭게 대처하는 사람이다. 책상머리에 잔머리 굴리면서 지성을 연마할수록 현실논리와 무관하거나 거리가 먼 관념의 파편을 양산할 수 있다. 오십 세 중반을 넘어서는 사람은 지금까지 나름 산전수전 경험을 통해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분명한 ‘시력(視力)’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시력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는 능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는 안목이자 식견이다. 지성의 근육을 단련하는 사람은 삶의 중심을 잡고 사안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지성으로 단련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으로 체득한 교훈을 뼈에 새길 정도로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잊지 않는 각골명심(刻骨銘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타성과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고 지성을 연마하는 사람은 우연한 마주침으로 색다른 ‘깨우침’을 즐기며 언제나 어제와 다른 ‘영감’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체험적, 인간적, 지적 마주침으로 어제와 다른 깨우침을 얻는 지성적인 오십 대는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배움의 방식도 많이 변하기 시작한다. 지성을 지속적으로 연마하는 오십 대는 한의원에서 맞는 침보다 내 몸을 어제와 다르게 움직이면서 직접 내 몸에 아로새기는 각성이나 촌철살인의 깨우침을 소중하게 개발하고 간직하려고 한다. 몸이 상쾌해진 사람은 머리도 ‘명쾌’해진다. 몸이 수직으로 서서 움직일 때 생각은 수평으로 누워 잠시라도 쉴 수 있다. 그 짧은 쉼이 숨 돌리며 머리를 명쾌하게 만드는 묘약이다. 움직임이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는 이유다. 짧은 시간이라도 산책하며 걸으면 생각의 발로(發露)가 발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❸감성(매력과 말): 어른의 품격을 높이는 유쾌한 언어 처방전
매력적인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르다.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지만 마음을 훔치면 연인이 된다.
햄버거를 먹으면 살이 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뇌안(腦眼), 즉 지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뇌안은 햄버거의 영양성분을 과학적으로 분석, 지방 함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햄버거를 먹을수록 살이 찐다는 결과를 내놓는다. 그런데 누군가는 햄버거를 보면 소의 아픔이 연상된다는 심안(心眼)으로 가슴 아픈 사연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느낌은 머리가 알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정직한 신체적 반응이다. 감성은 내가 몸을 움직여 겪어보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공감능력이다. 해보지 않고도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알 수 있는 뇌안은 지성을 개발한다. 하지만 직접 몸이 겪어보면서 감성적으로 느끼는 심안은 감성을 개발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논리적을 설명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설득한다.
감성적 설득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감지하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사람은 머리가 아프면 계산을 하면서 이해타산을 따지지만 가슴이 아프면 나에게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지며 과감하게 행동한다. 이들은 이해타산을 따지는 머리의 언어보다 몸을 던져 타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몸의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무엇보다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머리에서 비롯되지 않고 가슴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용기(courage)의 어원은 가슴(heart)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일리가 있는 이유다.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머리로 오랫동안 숙고하면서 검토를 거듭하기보다 가슴으로 느낌이 오면 머리로 올라가 생각이 시작되기 전에 과감하게 행동한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공감’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한편 감성적 설득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운동으로 깨어난 상쾌함과 지적으로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명쾌함과 더불어 ‘유쾌’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다. 이들은 함께 만나 화기애애(和氣靄靄)하고 온기정기(溫氣精氣) 살아가는 기반을 감성적 설득의 언어를 사용하는 소통에서 찾는다.
유쾌한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時角)’도 다르다. 부정적인 언어의 옷을 입은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다. 하지만 먹구름 속의 태양이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하늘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태양으로 절망 속의 희망을 낚아챌 수 있다. ‘용기(勇氣, courage)’가 넘치는 사람은 용기(容器, container)를 깨트리는 혁신적이지만 공감대를 형성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용기로 무장한 사람은 타인에게 ‘세심’한 ‘관심’을 갖고 애정 어린 눈으로 보살피며 타자를 배려하는 가슴 따듯한 언어를 사용한다. 타자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강한 사람이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머리가 발동되기 전에 측은지심으로 상대의 아픔에 눈을 뜬 덕분에 뜻밖의 ‘가르침’을 감성적인 언어로 부단히 벼리고 벼려서 표현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머리로 생각해서 얻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깨우침, 그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정문일침의 교훈을 필생의 깨달음으로 간직하기 위해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❹정성(협력과 관계): 중년 이후에 흔쾌히 수용하는 인간관계 처방전
정성 어린 관계가 의미심장한 존재의 의미를 결정한다
스치면 인연이지만 스미면 연인이 된다
정성을 다하는 인간관계는 단순히 예의상 성의를 표시하거나 일정한 조건으로 발목을 잡는 ‘접대’하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정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접’에서 비롯되는 미덕이다. 접대를 뒤집으면 대접이 된다. 접대는 받으면 안 된다. 접대받으면 옳은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에 걸린다. 하지만 대접을 받는 의미 속에는 존경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어서 오히려 흐뭇한 마음이 온몸을 따스하게 만든다. 정성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이전과 다르게 연대하게 만드는 신뢰자본이다. 오십 세가 되면 이제 접대받는 인간관계는 끊어버리고 대접받는 인간관계는 두 배로 늘릴 때 행복도 그만큼 배가된다.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마음씀씀이가 갸륵하기 이를 데 없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온기는 인간관계를 성심성의껏 정성을 다하는 아름다운 관계 맺음으로 유도한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대부분 절친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친구로 나타날 때 따듯한 ‘정기’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진심’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다.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람은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내가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파트너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거듭해야 되는지를 생각한다. 작은 배려와 격려,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는 진심 어린 한 마디의 말도 소중하지만, 귀담아 들어주는 경청이야말로 관계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가교다. 성인(聖人)이라는 말도 잘 들어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성인(聖人)의 성자를 보면 귀이(耳)가 먼저 나오고 입구(口)가 나중에 나온다. 먼저 잘 듣고 말은 적게 하라는 의미다.
뼈저린 ‘뉘우침’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배운 소중한 교훈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 만나면 기쁨이나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게 해주지 못하고 만나기 전부터 스트레스가 쌓이는 인간관계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만나면 밥맛이 떨어지는 안타까운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비호감인 사람을 만나며 스트레스 쌓이는 인간관계를 어쩔 수 없이 유지하며 살아간다. 나에게 아픔을 주는 관계는 끊어버리고 나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는 이어나갈 때 삶은 더불어서 소중하고 의미심장한 가치를 되새기며 행복한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만나서 ‘호감’이 가고 따뜻한 ‘정감’을 주고받으면서 이전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소중한 만남의 끈으로 이어지는 삶을 가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반면교사도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교사지만 남은 인생은 만나기 전부터 심장 뛰는 삶의 의미를 전해주는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다. 그래야 상대방의 정성 어린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여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연대을 구축할 수 있다.
❺탄성(탄력과 행복): 감탄사가 연발되는 통쾌한 행복 처방전
행동하면 행복해지고 행운도 따라온다
행복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매사를 ‘덕분에’ 잘 되었다고 감사하는 사람은 일상이 행복한 감탄사 천국이다. 반면에 매사를 ‘때문에’ 안 되었다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일상이 한심과 한탄이 자라는 텃밭이다. 감탄사 천국에 살아가는 사람은 부정보다 긍정, 걱정보다 인정하면서 타성에 젖어 살기보다 탄성을 말벗으로 살아간다. 탄성을 말벗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감동’ 받으면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면 와락 포옹하고, ‘감명’ 받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3감(감동, 감격, 감명)이 활력 있는 삶의 원동력이다. 일상이 경이로운 감탄의 원천이고 감사함의 대상이다. 이들에게는 꿈을 향해 살아가는 심장 뛰는 삶이 일상 그 자체다. 호랑이처럼 원대한 꿈을 품고 있지만 소처럼 우직하게 걸어가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비전과 전략을 쌍두마차로 살아간다. 이들은 앉아서 꿈만 꾸지 않고 나가서 막무가내로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는다. 행복한 비전(vision)은 내가 꿈꾸는 미지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시각화(visualization)하는 과정에서 현실로 구현되는 모습이다.
행복한 사람은 매사에 감사함을 표시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타성에 젖어사는 고루한 인생에서 탈피하는 게 최우선의 과제다. 탄성을 말벗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원대한 꿈과 한계에 도전하는 삶을 진지하게 반복하면서 ‘패기’ 넘치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행복한 삶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로 상정한 사람들을 당연히 남들에게 ‘귀감(龜鑑)’이 되는 사람이다. 이들은 틀에 박힌 일상도 어제와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실지(實地)의 사정을 살피는 다각적인 ‘시찰(視察)’을 통해 주어진 현실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심장 떨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들은 언제나 산전수전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판단착오를 줄여 나가는 가운데 몸으로 겪은 체험적 각성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소중한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들은 내 몸을 관통한 흔적과 얼룩이 씨 줄과 날줄로 직조되면서 다른 사람이 감동받고, 감탄하며, 감명받은 깨달음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는 사람이다.
감탄사 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발목을 잡는 사고의 한계들을 넘어서서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무장한다. 근거 없는 망상이나 몽상, 환상이나 허상은 허공에서 관념을 먹고 자란다. 행복한 인생을 꿈꾸는 사람은 밤에 꿈만 꾸지 않고 낮에 두 눈을 부릅뜨고 몸으로 꿈을 꾼다. 언제나 기본과 근본을 중시며 다양한 마주침을 통해 깨우침을 배우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튼실한 밑받침을 만들어나간다. 공자가 《논어(論語)》에서 말하는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기본 없는 기술은 하나의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기본기가 확고부동해야 자신만의 컬러와 스타일을 담아내는 필살기가 정련된다. 탄성을 삶의 미덕으로 추구하는 행복한 사람은 기본에서 멀어지고 술책을 강구하려는 사심이 싹틀 때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 일편단심 다짐하는 자세와 태도를 강력하게 만들어간다. 매사에 감탄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지키는 철칙이 하나 있다. 초심을 잃지 않고 몸을 던져 땀을 흘리는 사람이야말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