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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철학자 니체가 욕망 철학자
스피노자를 찾아간 까닭

절찬리 판매 중인 ‘절반의 철학’이 탄생한 사연과 배경

전복의 철학자 니체가 욕망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찾아간 까닭은?

   절찬리 판매 중인 절반의 철학이 탄생한 사연과 배경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따르면 욕망이 생기면 그걸 실현할 역량이 있어야 하고, 역량이 생기면 이전과 다른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과 역량은 인간의 능력을 향상하는 쌍두마차인 셈이다. 욕망이 강하지만 그걸 실현할 역량이 부족하면 좌절하고, 역량은 있지만 그걸 사용할 욕망이 없으면 무기력에 빠진다. 욕망을 역량으로 실현하는 과정은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동이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면서 사람은 비로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때 사람은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다. 욕망을 충족할 역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어느 시점에서 욕망이 충족되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전과 수준과 차원이 다른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 욕망을 충족할 역량을 개발하는 학습활동에 몸을 던지는 선순환이 반복될 때 삶은 반전을 거듭하고 행복한 성취감을 맛본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로 이어지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란 한마디로 기쁨을 느끼는 순간에 찾아오는 최고의 행복이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존재 이유(理由)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自己)’로부터 말미암(由)을 때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내가 하는 일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 일을 할수록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성공과 실패가 나로부터 말미암을 때 나는 책임감을 갖고 성장하는 배움의 여정을 반복한다. 비록 일이 생각했던 방향으로 풀리지 않을 때도 내가 결정해서 시작한 일이라서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다음을 기약한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事故)가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사고(思考)를 선물로 준다. 사고(事故)가 사고(思考)를 바꾸는 자체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순간, 도피나 좌절보다 이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도전을 감행하면서 색다른 배움이 꿈꾸는 욕망의 물줄기를 따라간다.


이럴 때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하는 ‘코나투스’가 힘을 발휘하면서 이전보다 밀도감이 높은 행복감을 선물로 가져다준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실존을 지속시키려는 근원적인 욕망이다. 자기 보존의 욕망인 ‘코나투스’가 실현되면 기쁨이라는 감정이 찾아오고 자기 보존의 욕망이 막히면 슬픔이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코나투스’는 가급적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주는 욕망을 추구하며 자기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일종의 관성이다.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발전시켜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을 성취하려는 끈질긴 경향이다. 우리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코나투스’를 찾아내서 그걸 더 강화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자기다움을 강화시키는 욕망탐구 여정이다. 자신이 하면 즐겁고 신나서 ‘코나투스’가 더욱 발현되는 길을 찾아간다.



나의 ‘코나투스’를 떨어뜨리는 일은 절반으로 줄이고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일은 두 배로 늘리는 길이 오십 중반 이후를 행복하게 사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창조하는 원인을 제공해 준다. ‘힘에의 의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틀에 박힌 일상의 무료함에서 벗어나 뭔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고 보람과 의미가 드러나게 만드는 에너지 또는 생명력을 말한다. 이런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은 틀에 박힌 일상에서 어제와 다른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고 끊임없이 예술적 창작욕망을 불태우며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고 창조하면서 기존의 억압된 구속이나 틀에 박힌 통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뭔가를 창조하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통념이나 관성에 젖은 타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존의 해석 체계를 창조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발버둥 치며 성장하려는 의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생성의 의지, 내가 하면 행복한 에너지가 솟아 나오는 것을 못하게 막는 구속과 저항을 극복하려는 초월의 의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면서 힘이 되는 상승작용의 의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적 의지다. 내가 하면 힘이 되는 공부를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공부, 즉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공부는 두 배로 늘리고 현실에 안주하며 과거의 성공체험이나 통념에 의존하려는 습관을 절반으로 줄이기만 해도 살아가면서 공부하는 의미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의 개인적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활력이 생기는 ‘코나투스’를 넘어선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서로가 서로에 힘이 되는 일을 통해 혼자 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생명력뿐만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의 생명력을 창조하려는 의지로 발전한다.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주인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내가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과 프레임을 따르며 사는 대로 살아가는 미래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때가 되면 다가오는 단순 미래다. 단순 미래가 아무리 지나가도 나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반면에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지향하는 미래는 뭔가를 추진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힘이 되며 열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설레는 미래다. 이런 미래는 나의 의지에 따라 전혀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의지미래다.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 미래의 결과이지만, 생각하면서 나의 의지대로 자유를 추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은 의지미래의 산물이다. 단순 미래는 절반으로 줄이고 의지 미래는 두 배로 늘리면 오십 후반전은 반드시 반전이 일어나는 앎음다운 미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일의 시작이나 원인이 나로부터 말미암은 것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는 하고 싶지 않지만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통해 나의 존재감을 만들어왔다. 이럴 경우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불타오르지 않고 당연히 그 욕망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역량도 개발되지 않는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내 나이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내가 앞으로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 남은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말은 내가 살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몇 살까지 살지 모르는 세상에 남이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각본대로 남의 인생을 살고 싶은가? 뭔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언제나 심장이 떨리지 않고 다리가 떨리는 인생, ‘코나투스’가 통하지 않아 기쁨보다는 슬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힘겨운 삶, 힘에의 의지가 상실되어 어제와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과 의지가 없어진 암담한 인생을 살 것인가? 



니체는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에서 ‘선(good)과 악(evil)’, 그리고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을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선과 악’은 우리가 주어인 모럴(moral, 도덕)이고, ‘좋고 나쁜 것’은 내가 주어로 작용하는 에틱(ethics, 윤리)이다. ‘선과 악’은 나의 선호에 관계없이 사회가 이미 그렇게 해야 된다고 강제로 정한 규범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되는 집단적인 떼거리의 도덕이다. 반면에 ‘좋음과 나쁨’은 내가 주어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정되는 나의 윤리적 행동지침이다. ‘선과 악’은 사회에서 강제로 정한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되는 힘의 원천은 종교적 규율이나 사회적 관습과 같은 외부적 권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좋음과 나쁨’은 철저하게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나의 입장과 철학적 신념에 따라 결정된다. ‘선과 악’은 남이 정해놓은 규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노예의 인생이고, ‘좋음과 나쁨’을 따라가는 사람은 내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며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다. ‘선과 악’을 따르는 도덕은 가급적 줄이고 ‘좋음과 나쁨’의 윤리적 행동지침은 두 배로 늘려야 오십 후반전에서 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


자유는 욕망이 역량을 만나 꿈을 실현할 때 찾아오는 최고의 기쁨이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를 쓰면서 염두에 둔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다. 니체가 말하는 ‘선과 악’을 가르는 도덕(moral)의 원천은 스피노자의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기준인 '에틱(ethics)'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저술한 《에티카》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코나투스가 바로 나에게 기쁨을 주는 에너지는 이어가고 슬픔을 주는 에너지는 끊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사회가 정한 보편적 도덕이 아니라 내가 정한 개별적 윤리에서 비롯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로 이어지면서 선악을 넘어 좋음과 나쁨을 기준으로 주인처럼 살아가는 문이 비로 열린 것이다. 스피노자와 니체에 따르면 누군가 이미 정한 보편적인 가치판단 기준에 종속되어 노예처럼 살지 말고, 내가 하면 기쁨이 배가되며 주인의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어제와 다른 나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며 주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 즉 초인이다. 오십 후반전에 반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남들이 정한 선악의 도덕을 따르는 삶을 끊고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삶을 끈기 있게 이어나가야 한다.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이성이나 이익이 명령하는 것에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은 짓을 제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설사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더라도 하고 싶은 걸 어쩌겠는가. 뿐만 아니라 천하 없는 일이 있어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경우도 있다.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욕, 아무리 엉뚱한 것일지라도 하여튼 자기 자신의 변덕, 미치광이 같은 것이라도 좋으니 하여튼 자기 자신의 공상-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가장 유익한 이익이다. 이것만은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이익이며 또 이것 때문에 일체의 이론이 박살 나 버리는 것이다”(39쪽).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성의 명령은 ‘선과 악’이며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욕이나 변덕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을 따르는 나 자신이다. 논어(論語)에는 선악을 따라가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의 공부와 좋음과 나쁨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를 구분한다. 누군가가 정한 성공 로드맵을 따라가며 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즉 위인지학을 끊어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해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자유로운 공부, 즉 위기지학을 끈기 있게 이어갈 때 오십 후반전은 반전이 일어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자유는 욕망과 역량이 쌍두마차처럼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능동적으로 행동할 때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최고의 기쁨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에 기쁨으로 만끽하는 순간을 얼마나 느끼면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순간을 지속적으로 맞이하면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재음미하며 살아가는 의미를 배가시키는 에너지가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요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다. 오늘도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최고의 기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부단히 어딘가를 향해 움직인다. 호기심을 갖고 움직이면서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두 배로 늘리면 어제의 다른 내가 탄생된다. 그 순간 나의 욕망은 내 존재를 더 살아 숨 쉬게 만드는 방향으로 꿈틀거린다.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 꿈으로 향하는 욕망에 심장이 뛴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의지는 능력을 두 배로 신장시키는 공부여정에 열정적으로 몰입하게 되며, 그 결과 우리는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선순환의 여정이 어제와 다르게 반복된다.


스피노자의 욕망과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은 칙센트미하이가 《몰입의 즐거움》에서 밝힌 몰입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난이도가 높은 도전과제가 주어졌을 때, 내가 그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면 불안감이 가중된다. 반대로 내가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너무 쉬운 도전과제가 주어지면 나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떤 도전과제가 주어졌을 때, 그 과제를 수행할만한 정도의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몰입의 통로가 개통된다. 사람은 한 번 몰입경험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게 되면 이전보다 더 난이도가 높은 과제에 도전하면서 여기에 상응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활동을 하는 가운데 이전과 차원이 다른 몰입경험을 하게 된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에 비추어 볼 때 행복한 오십 후반전을 사는 비결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난이도를 조금 더 올려서 거기에 상응하는 전문성을 단련하는 배움을 반복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다. 도전과제의 난이도를 높이고 싶은 욕망은 그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역량개발을 요구한다. 나이 들어 가장 행복한 요구는 내 욕망을 부추기는 밖의 자극이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되는 내재적 욕망이다.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원인으로 성취감을 맛볼 때 가장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유다.



이미 몰입의 통로에서 자유를 구가하며 행복한 후반전에 돌입한 사람은 도전과제의 난이도를 조금씩 높여가며 더욱 행복한 삶을 이어가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몰입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 지금부터라도 얼마 남지 않은 후반전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행복 처방전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미’ 살아본 오십이 ‘아직’ 살아보지 못한 오십에게 말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이미 늦은 거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후반전을 뛰는 절호의 찬스라고. 그 찬스를 잡는 비밀 열쇠가 ‘절반의 철학’에 있다.



절반의 철학이 추구하는 다섯 가지 철학적 가정


절반의 철학은 위반(違反)이다. 오십 이전의 삶을 배반하고 이전과 다른 패러다임으로 삶을 철학과 방향을 재점검하고 재정립하는 시점이다. 지금까지는 채움의 삶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버림의 삶, 절반으로 줄이는 삶, 복잡한 관계를 단순한 관계로 정리하는 삶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반은 법적 위반으로 처벌을 부르는 범법 행위가 아니다. 절반의 철학이 지향하는 위반은 기존 삶의 철학과 가치관을 부정하고 그 위에 다시 위대한 사유체계를 재건축하려는 위험한 행동이다. 통념에 젖어 사는 타성과 관습의 덫에 걸려 마지못해서 살아가는 삶, 남이 만든 도덕과 형이상학적 신념에 종속되어 식민지적 사유로 살아가는 삶에 반항하는 삶이 위반이다.


절반의 철학은 기반(基盤)이다. 절반의 철학은 지금까지의 삶을 위반하고 그 위에 새로운 삶의 정초를 구축하려는 절박한 움직임이다. 마치 니체가 기존 철학적 전통과 지향점을 깨부수고 그 위에 새로운 철학적 전통을 건축하려는 전복의 철학의 시도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기반은 진통 속에서 전통으로 발전한다. 오십 이전의 삶이 내 삶의 전반전을 차지했다면 이제 후반전의 삶은 이전과 다른 삶의 철학과 가치관으로 새로운 배움의 여정을 떠나는 출발점을 마련해야 한다. 절반을 통해서 언제나 이전과 다른 기반을 다지는 과정을 멈추지 않을 때 절반은 언제나 새로운 기초를 다지는 어제와 다른 몸부림이자 또 다른 출발이다.



절반의 철학은 동반(同伴)이다.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습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와 같은 것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對敵)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40쪽). 신영복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절반의 철학은 절반과 절반의 경계에서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하는 철학이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패배의 끝에서 승리를, 비탄의 끝에서 환희를 꿈꾸는 철학이 바로 절반의 철학이다. 이런 점에서 절반은 언제나 배우는 과정을 영원한 친구로 사귀는 도반(道伴)이기도 하다.


절반의 철학은 등반(登攀)이다등반에는 등정주의(登頂主義)와 등로주의(登路主義)가 있다. 남보다 빨리 오르는 데에만 전력투구하는 등정주의와 남다른 방법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등로주의`다. 등정주의는 남들이 닦아놓은 익숙한 길, 보다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확실한 직선 루트를 따라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상등정을 노린다. 이에 반해 등로주의는 빠른 길보다 분투와 노고 속에서 발견의 기쁨을 즐기고 모험과 도전 속에서 성취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길을 선택한다. 등정주의는 한 마디로 산을 정복대상으로 보는 등산전략이지만 등로주의는 산과 혼연일체가 되는 입산 전략이다. 절반의 철학은 인생 후반전을 속도전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반의 철학은 시계보다 나침반을 들고 남은 인생을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면서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정상 도전을 즐기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절반의 철학은 열반(涅槃)이다. 열반은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지칭한다. 보통 사람이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삶과 다르게 고정관념이나 통념에서 벗어나 참자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보려는 안간힘을 쓰고 애간장을 녹여보는 것이다.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경계는 아니다. 내가 경지에 이르는 동안 깨닫는 법열(法悅)과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면서 느끼는 지적 단련 과정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된다. 내가 목표를 얼마나 많이 달성했느냐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 출발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진전되었는지를 따져보는 정진의 정도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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