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책상에서 만들지만 방법은 일상에서 개발한다
‘법’대로 하는 일은 절반으로 줄이고, ‘방법’ 개발은 두 배로 늘린다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는 오지 않고 통증만 내 몸에 남는다
법은 아무나 만들 수 없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입법이다.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법이다. 법은 과거지향적이다. 물론 미래사회를 지금과 다르게 상상하면서 필요한 법을 사전에 만들 수 있지만 대부분의 법은 이미 일어난 사건과 사고를 규제하고 불특정 다수의 국민들에게 억울한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한 사전 조치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업자나 직장인은 법대로 하지만 사업가나 장인은 법대로 안 되면 자신만의 법, 방법을 개발하는 방법개발전문가다. 법은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지만 방법은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사업자나 직장인은 법대로 안 되면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사업가나 장인은 법대로 안 되면 법을 능가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간다. 사업자나 직장인은 해보기도 전에 한계선을 긋지만 사업가나 장인은 시도하면서 한계에 도전한다.
법대로 하는 사람은 주로 책상에 앉아서 다양한 구상과 계획, 검토와 분석을 통해 사안의 실현가능성이나 장애요인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 본다. 법은 난공불락의 철칙이자 반드시 따라야 할 원칙이고 지침이다. 하지만 현실은 법이 수용하지 못하거나 법의 잣대나 기준으로 판정하기에는 딜레마적 이슈가 혼재되어 있는 회색지대가 너무 많다. 사업자나 직장인은 주어진 일의 범위나 제한된 틀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모색하며 효율과 성과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가급적 새로운 도전이나 낯선 세계로 향하는 도전보다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면서 안정과 조화, 규율과 관습에 따르는 삶의 방식을 선호한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은 미래 가능성을 위해 현실을 희생하는 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지금 고생하는 목적은 고생 덕분에 미래는 희망적일 것이라는 가정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인생에서 소중하게 지켜야 할 원칙이나 다름없다. 고진감래를 삶의 철학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당장의 건강과 행복보다 미래의 언젠가 누리게 될 행복한 시간을 꿈꾸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이들이 범하는 치명적 실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을 자기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해내려는 안간힘이다. 고진감래를 믿는 사람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한 노동으로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한 채 평생을 남들처럼 살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우리가 주어인 삶을 살아가다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때 인생에 남는 것은 내가 그동안 남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는 처참한 후회뿐이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신체가 존재하는 동안 신체와 더불어 일어나는 내 삶의 일상을 어제와 다르게 반복하는 노력이다. 신체가 갈망하고 욕망하는 일상적 삶에서 신체와 더불어 부딪히는 모든 체험적 일상이 내 삶의 일상이고 내 행복의 원천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사지가 멀쩡할 때 미래의 언젠가 향유할 행복을 담보로 가정법 인생을 산다. 그렇게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가 온다는 고진감래를 믿고 전력투구 했지만 마지막으로 내 신체에 남는 것은 신경통과 관절염, 연골파괴와 디스크 등 온몸에 남기는 병뿐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이제 고진통래(苦盡痛來)로 바뀌면서 고생 끝에 남는 것은 온갖 통증뿐이다.
방법은 책상에서 만들 수 없고 오로지 실행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엘렌 코트의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는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로 시작해서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돼라.”는 구절로 끝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유영만의 ‘운동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도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도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돼라.”로 끝난다. 시작하는 방법은 그냥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하면 방법이 생긴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언가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사실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시작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몸이 더 위험하다.
다리 떨지 않고 심장 뛰는 삶을 사는 사람은 키에르케고르가 구분한 ‘쿨 버드(Cool Bird)’에 대응하는 ‘핫 버드(Hot Bird)’다. 핫 버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능에 도전하며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하는 사업가나 장인이다. 핫 버드는 세속적인 이유를 넘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도전과제를 완수하겠다는 신성한 이유(calling)를 갖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직접동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내가 살아야 되는 신성한 이유는 숭고한 목적에서 나온다. 성장체험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체험적 깨달음이자 성숙해지는 각성이다. 예를 들면 부유한 변호사로의 길을 포기하고 압제에 저항하는 비폭력 도덕 정치가로 변신하게 해 준 각성사건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간디의 삶을 만들어준 것처럼 “각성사건은 목적과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경험이자 자신의 소명에 대한 체험이다(139쪽).” 각성사건은 한 사람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자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달으며 다시 태어나는 제2의 탄생과정이다.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가장 소중한 이유나 목적은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삶인지를 깨닫는 각성사건이 많은 삶에서 찾아진다.
각성사건은 생각의 분량이 아니라 움직임의 분량에 비례한다. 격렬하게 움직이되 다치지 않는 움직임의 바다, 눈부신 움직임의 산맥. 힘들 때 한 없이 깊어지는 포기의 생각,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신성한 목적, 행복할 때 꽃잎처럼 전율하는 근육의 떨림이 어울림의 하모니를 이룰 때 중년 이후의 삶은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각성사건은 주로 여행을 통해서 깨닫는 각성체험의 산물이다. 여행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사소한 것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소중하게 다가오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소중한 체험적 사유의 과정이다. 사소한 것을 더 이상 사소한 것으로 보지 않고 거기서 이전과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과정이 다름 아닌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실감을 느낄 때, 사람은 ‘떨림’을 체험한다. 있어야 할 때도, 있어야 할 장소도, 해야 할 일도 단독적으로 오지 않는다”(29쪽).
- 우치다 다쓰루 엮음,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
편안함은 절반으로 줄이고 불편함은 두 배로 늘린다
움직이면 흔들리는 살들, 멈추면 느껴지는 지방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유래한 안나 카레니나 법칙에 따르면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라고 한다. 이 법칙은 운동에도 적용된다. “운동하는 사람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운동하지 않는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은 이렇듯 ‘운동’에도 적용된다. 운동을 안 하기로 핑계를 대고 5분을 더 자는 달콤한 순간적 착각과 쾌락이 50분을 정신없이 자게 만든다. 정신없이 자다가 헐레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될수록 건강과 먼 불편한 노후를 보장받는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금보다 더 편안함을 찾아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어렵고(difficult) 위험하고(dangerous) 더러운(dirty) 소위 3D 업종은 기계에게 맡기고 대신 그 시간에 사람은 좀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머리는 물론 몸을 더 안 쓰니까 용불용설(用不用說)에 의해서 뇌기능이나 신체기능은 점차 퇴화되기 시작한다.
“10분 넘어가는 영상은 무조건 2배속으로 시청해요.”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연구센터 연구원이 최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봐야 될 디지털 정보가 많아지고 특히 영상이 폭증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인내심은 점차 고갈되어 간다. 심지어 2시간짜리 영화를 2배속으로 시청하면서 영화 줄거리를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본다. 메시지의 의미를 음미하고 분석하고 비교해서 그것이 나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함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없다. 내 대신 누군가 편리하게 요약해 주는 기능에 나의 뇌를 외주화(outsourcing)시킨다. 이런 점에서 가성비에 버금가는 새로운 신조어가 ‘시간 대비 성능’을 따진다는 ‘시성비’가 핫 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발표한 ‘편리미엄’이란 단어 역시 ‘편리한 것에 프리미엄(추가 요금)을 기꺼이 지불하는 트렌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제 두꺼운 책은 물론 가벼운 책도 내가 직접 읽는 독서(讀書)가 아니라 남이 읽어주는 독서를 귀로 듣는 청서(聽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의 뇌와 신체는 자본으로 편리함을 살수록 몸과 마음은 안락함의 덫에 걸려들기 시작한다. 내 손으로 직접 뭔가 만드는 것도 누군가 대신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거의 모든 걸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외주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상온에서 음식을 보관하는 체험적 노하우는 냉장고가 나오면서 실종되기 시작했고, 빨래는 세탁기를 넘어서 이제 세탁 서비스를 통해 집에 깨끗한 옷을 배달 서비스받는다. 음식은 대부분 서비스를 이용해 주문해서 먹고 식재료 또한 새벽 배송을 비롯해 집에 앉아서 모든 걸 해결한다. 움직임은 점차 줄어들고 먹는 양은 많아진다. 설상가상으로 정제된 탄수화물과 염분, 그리고 당분이 고함량 함유된 배달음식과 외식에 의존하면서 몸은 성인병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방은 몸 곳곳에 축적되면서 움직이면 흔들리는 살들이 아우성을 쳐도 내 몸은 못 들은 척한다. 젊어서 편안함에 투자하면 시간과 노력만큼 나이 들어서 보내는 불편한 시간은 늘어난다. 고급진 음식, 비싼 차, 그리고 안락한 침대가 우리를 침대에서 안락하게 죽게 만드는 주범임을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아주 죽기 전에 알아차리자.
신체의 ‘신음’이 만들어낸 것만이 ‘믿음’이다
신체가 짊어질 수 있는 짐이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마지노선이다. 신체가 현실적인 짐을 짊어질 수 없다면 나에겐 미래도 꿈도 없고 비전은 슬픈 비전(悲典) 일뿐이다. 신체는 이전보다 힘든 상황에서만 힘을 쓴다. 기존의 힘으로도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고 신체가 판단하면 신체는 힘을 쓰지 않는다. 힘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각도 거기서 멈춘다. 신체가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기존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만 신체는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다.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만 신체는 힘을 들여서 난국을 극복한다. 신체의 신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더 힘든 위기 상황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신음 없이 새로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신체로 확인한 믿음만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이전과 다른 물음을 제기하며 웃음 짓게 만든다. 몸이 관여해서 깨닫는 힘겨운 싸움이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디딤돌이자 원동력이다. 운동의 ‘아픔’과 ‘고통’ 사이, 그 사이에서 생각의 차이가 자란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Pain is invitable, suffering is optional”(9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 나오는 말이다. 운동하면서 느끼는 아픔(pain)이 아니라 고통(suffering)이다. 아픔은 태생적이라서 불가피하다. 태어날 때 산모가 겪는 아픔은 피할 수 없다. 정면으로 맞서는 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산통이 주는 고통은 내가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고통은 아픔에 대해 사후에 내가 느끼는 주관적인 경험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내가 겪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고통은 상대적인 느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에 내가 처음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 풀코스에 출전했을 때 느꼈던 신체가 겪었던 아픔이나 통증은 피할 수 없는 신체 경험이었다. 마라톤이라는 힘든 운동을 선택해서 춘천까지 달려간 내 몸이 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 아픔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몸을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 상황으로 데려가는 길 뿐이다. 아픔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움도 없다. 똑같은 아픔도 내가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고통으로 내 몸에서 해석된다. 해석이 달라지면 골머리를 아프게 했던 문제도 해결된다.
아름다움은 아픔을 겪어내며 안간힘을 쓰면서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다움이기 때문이다. 아픔은 내 신체가 겪는 객관적 데이터이고, 고통은 아픔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문제다. 사람들이 고통에 더욱 시달리며 몸부림치는 이유는 내 몸이 직접 경험하는 객관적인 통증이 아니라 내 몸으로 느끼는 주관적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통증은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약을 통한 치료 대상이지만 주관적인 고통은 고통의 근원을 어루만져주면서 그것으로 지금 겪고는 그 사람의 진정한 고뇌가 무엇인지를 공감하고 감정이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도 고통은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의 곁에서 고통과 함께 할 뿐이다. 우리가 진정한 치유자라면 그 사람의 아픔이나 통증을 치료(cure)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보살피고 돌봐주는(caring)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저서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서 인간이 변하는 두 가지 경우를 들었다. 하나는 상대방이 저항할 때, 다른 하나는 자신이 고통받을 때라고 했는데 근육도 마찬가지다. “근육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힘든 운동에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근육이 힘든 운동에 고통받을 때다.” 돈 들여서 다이어트로 살은 뺄 수 있지만 아무리 돈을 들여도 근육은 생기지 않는다. 근육량은 내가 난관을 돌파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물리적 강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근육은 오로지 땀과 노력의 산물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만약 진리의 이 조그만 첫 물방울 하나가 마치 심리적인 폭탄처럼 이토록 폭발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면 진리가 폭포처럼 무너져 내릴 때 과연 우리나라 몸에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그렇다. 분명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444쪽).
- 알렉산드르 솔제니찐의 《수용소군도 1》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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