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기는 절반으로 줄이고, 가꾸기는 두 배로 늘린다
꾸미지 말고 가꿔야 나다운 내가 된다
살다 보면 자신이나 자신이 만든 작품을 꾸미거나 가꾸는 게 필요하다. 꾸미는 일은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장(包裝) 하거나 화장(化粧)해서 겉모습과 다르게 보이기 위한 가장(假裝)이나 위장(僞裝)이다. 이에 비해 가꾼다는 의미는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나 본질적 속성을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만든다는 의미다. 가꾸는 노력은 자기 입장이나 주장을 분명하게 확립함으로써 어제와 다른 성장, 즉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다. 꾸밈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자신이 어떻게 어울리거나 맞을지를 생각하는 꾸미기가 계속될수록 나는 없어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반복된다. 오십 후반전의 삶은 가장하고 위장하는 꾸미기의 삶과 결별하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가꾸기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가꾸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나다움이나 자기다움이 잘 드러나게 하거나 더 낫게 하는 일이다. 가꾸면 가꿀수록 자기다움의 쓸모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꾸미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살리는 의미보다 어떤 것을 덧붙이거나, 본래의 성질을 변화시켜 다른 것이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어서 과장이나 포장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점에서 꾸미는 문장은 남의 주장으로 자기 입장을 포장하는 노력이지만 가꾸는 문장은 자기 생각과 자기만의 언어로 문장을 건축,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애쓰기의 산물이다.
쓰지 않으면 쓰임이 없다. 생각만으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꾸밀 것인지를 생각을 거듭해도 뜬구름 속의 공상과 망상만 가중될 뿐이다. 자기 다운 문장을 가꾸는 노력은 무조건 쓰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길을 열어준다.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한 것을 일단 겉으로 표현해 봐야 자기 다운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색다르게 가꾸는지를 알 수 있다. 쓴 글을 보면 어느 부분이 지나치게 과장되었고 위장된 의미를 감추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대작(大作)과 명작(名作)도 실패작으로 시작했다. 세상의 들은 남의 이야기로 꾸미지 말고 내가 겪은 경험으로 나의 이야기를 가꾸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할 때 가장 자기 다운 문장이 탄생된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다 보면 ‘글발’이 생기고 ‘말발’이 서며, 더불어 ‘끗발’이 생긴다. ‘글발’은 결국 ‘끗발’로 완성된다.
흔히 가꿀 게 없으면 꾸미기 시작한다. 가꾸는 것은 굳이 꾸미지 않는다. 꾸민다는 것은 꿍꿍이속이 있어서 허위와 가장(假裝)으로 치장(治粧)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자연 그대로의 정체가 드러날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지 말고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재능을 가꿔야 `나다운 나`가 된다. 꾸밈은 남다르게 드러내기 위한 안간힘이지만 가꿈은 색다름을 드러내려는 애쓰기다. 꾸밀수록 남달라 지지만 가꿀수록 색달라진다. 꾸미는 노력이 반복될수록 남달라 지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지만 가꾸는 노력을 거듭할수록 색달라지기 위한 자기다움을 만들어나간다.
도무지·도루묵·도대체 3형제가 꾸미기와 가꾸기를 논하다
어느 날 도무지, 도루묵, 도대체 3형제가 만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도무지`가 우리는 왜 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무지(無知)를 드러냈다. 도무지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사는 것인지, 내가 하면 신나는 일이 무엇인지 등 질문이 이어지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왜 남을 의식해서 꾸미는 일에만 몰두하는지도 궁금해서 도무지에게 물어봐도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루묵`이 한 마디 거든다. 자신도 `도무지`가 던진 질문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서 자신이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을 조용히 반추해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루묵`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그렇게 열심히 꾸미는 일에 몰두했지만 꾸밈을 멈추는 순간 원상태로 되돌아와서 `도루묵`이 되었다는 것이다.
`도무지`와 `도루묵`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도대체`도 내가 왜 사는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왜 나는 나다움을 드러내는 가꾸기보다 남달라 지려는 꾸미기에 혈안이 되고 있는지를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도루묵` 그리고 `도대체`는 내가 누구인지, 나답게 살기 위해서 꾸미지 말고 가꾸는 노력에 왜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꾸미는 인생을 살수록 왜 더 불행한 삶으로 다가오는지를 다시 한번 숙고해 보기로 했다.
‘도무지’는 가꾸는 화장은 위장이나 가장을 통해 과장되게 자기를 포장하는 노력으로 그칠 수 있음을 깨닫고 무지의 늪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도루묵’도 꾸미는 화장은 자기 과장일 뿐 기고만장(氣高萬丈)한 모습을 보이다 끝장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수라장(阿修羅場) 직전에 깨달았다.
‘도대체’는 무지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도무지’와 침묵 끝에 궁극의 진리에 이른 ‘도루묵’의 깨우침에 힘입어 가꾸기야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임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는 꾸미는 화장보다 가꾸는 노력이야말로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길임을 도무지와 도루묵에게도 가르쳐주었다. 도대체는 자기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꾸기 방법을 도무지와 도루묵에게 권장하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꾸미기의 포로에서 가꾸기의 프로로 변신해야 한다. 경지에 이른 사람은 모두 프로다. 가꾸기의 프로는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다움을 토로(吐露)하는 포로(捕虜)이기도 하다. 꾸미는 사람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꾸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꾸미는 사람은 남과 다른 차별화를 추구하지만, 가꾸는 사람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전력투구한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가 이 자기 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고 중심 테마이기도 합니다”(132쪽).
-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