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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살은 절반으로 줄이고
넉살과 익살은 두 배로 늘린다

뱃살은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무책임한 비무장 지대다

뱃살은 절반으로 줄이고넉살 익살은 두 배로 늘린다


뱃살은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무책임한 비무장 지대다


뱃살과 비무장 지대는 무슨 관계일까? 인공지능 시대, 인공지능은 취약하지만 인간은 강점으로 지니고 있는 능력 중에 유추 능력이 있다.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익숙한 두 가지를 낯설게 연결시키는 가운데 발현되는 이연연상 능력이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뱃살과 비무장 지대는 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갑자기 연결된다. “뱃살은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무책임한 비무장 지대.” 서울대학교 김영민 교수가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뱃살에 관하여’라는 칼럼에 나오는 글이다. 


뱃살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군더더기 살, 군살이다. 뱃살은 다른 사람에게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망신살이다. 세월의 흐름으로 생긴 인생의 내공은 주름살로 가지만 식탐과 운동부족이 만든 합작품은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무책임한 비무장 지대에서 비만으로 살아간다. 복부비만은 몸집을 무겁게 만들어 태만을 친구로 불러들인다. 복부비만은 태만과 함께 출렁이는 지방의 바다에서 소리 없는 파도소리 들으며 24시간 잠복근무 중이다. 뱃살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한 게으름의 상징이다. 배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먹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제 먹는 게 남는 거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먹은 칼로리만큼 운동이나 이동으로 소비하지 않으면 먹는 게 남아서 내장 지방으로 축적될 뿐이다.



움직임이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도 결정한다. 뱃살이 출렁이기 전에 사생결단, 운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당신의 건강 백세는 질병 백세로 반드시 바뀐다. 뱃살은 모든 건강의 적신호를 내장에 내장지방으로 축적한 산물이다. 내장지방에 축적된 그동안 먹은 것의 잔해들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보내지지 않고 뱃살에 고스란히 남아 출렁이는 지방 왕국을 만드는 건축 재료로 활용된다. 뱃살은 염증지수를 높이는 물질을 생산하고, 고혈압이나 당료를 비롯한 모든 성인병의 온상으로 작용한다. 뱃살은 세월이 가져다준 나잇살이 아니다. 뱃살은 과도한 음주와 탐식, 운동부족이 만든 사회역사적 합작품이다. 뱃살은 당신의 잘못된 식습관이 만든 탐욕의 증표이며, 삶을 얼룩지게 만드는 구김심살이다.


행복은 허리둘레에 반비례하고 허벅지 두께에 정비례한다. 중년 이후 행복해지고 싶으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대상이 뱃살 빼기다. 뱃살은 살살 빼기의 대상이 아니라 초전박살 대상이다. 지금 당장 유산소 운동을 비롯한 뱃살 빼기 운동을 구체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노화는 가속화되고 삶의 질은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엄살 부릴 시간이 없다. 지금 가장 먼저 불태워야 할 것은 굳은살로 가기 전에 뱃살에 포진된 내장 지방이다. 그래야 건강의 적신호를 청신호로 바꿀 수 있다. 몸매가 망가지면 몸 빼 바지 입어야 한다!



당신의 필살기는 넉살과 익살이다


살아가면서 ‘나잇살’을 먹는다고 자동으로 넉살과 익살이 생기지 않는다. 먹기 싫어도 먹게 되는 ‘살‘이 바로 ’ 나잇살‘이다. 세월의 흐름을 역류시킬 수 없다. ’ 나잇살‘이 정신적인 연령으로 성숙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체적 연령으로 인식되어 청춘의 열정과 용기를 잃어가는 사람이 있다. 육체적 ’ 나잇살‘에 관계없이 정신적 연령이 축적되어 삶에 대한 관조적 자세와 함께 청춘의 열정은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뱃심과 배짱이 있어야 하지만 ’ 뱃살‘은 굳이 없어도 되는 ’ 살’이다. 예전에는 ‘뱃살’ 좀 나와야 인격으로 봐주었지만 지금은 자기 계발을 안 하는 게으른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먹는 ‘나잇살’과는 다르게 ‘뱃살’은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대로 생기지 않게 노력할 수 있는 ‘살’이다. 


‘뱃살’은 건강에 안 좋지만, ‘넉살’과 ‘익살’은 있으면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데 매우 필요한 ‘살’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절대 긍정으로 웃어넘길 줄 아는 살이 ‘넉살‘이다. ‘넉살‘ 좋은 사람에게 화가 난다고 침을 뱉을 수 없고 야단을 칠 수가 없다. 화를 내고 야단을 치려는 순간 그 ‘넉살‘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기 때문이다. ‘넉살‘에 비해 ‘익살‘은 유쾌한 위트와 유머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살’이다. ‘넉살’이 별다른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사람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지만, ‘익살’은 그래도 여유를 갖고 웃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유쾌함과 통쾌함을 가져다준다.



익살’과 ‘넉살’이 없으면 마지막 비장의 카드에는 ‘엄살’도 있다. ‘엄살’이 진정성이나 진실함을 근간으로 발휘되지 않고 지나치게 과장되면 엄한 사살의 타깃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엄살’은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한 가운데 발휘해야 될 마지막 ‘화살’이다. 필요할 때는 자신을 낮추고 무리하게 도전할 필요가 없을 때 ‘엄살’을 부려도 된다. ‘엄살’을 부리는 동안 생각지도 못하게 위기나 딜레마 상황도 시간과 더불어 넘어간다. 


혼돈의 시대, 불확실성의 바다를 건너는 방법은 뱃살은 절반으로 줄이고 넉살과 익살은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나이 들어서 더욱 필요한 능력은 사람을 웃음 짓게 하는 유머 능력이다. 실력과 더불에 유머를 갖춘 사람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자기편으로 만들 ‘필살기(必殺技)’를 갖춘 셈이다. 유머가 부르는 재미는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통렬한 깨달음의 뒤통수를 맞았을 때 찾아온다. 의외성과 기대 저버림에서 재미가 나온다. 유머는 한바탕의 웃음이 아니다. 틀에 박힌 일상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살펴보면서 본질을 꿰뚫는 직관과 더불어 뜻밖의 통찰을 줄 때 일어난다. 유머는 기대를 저버릴(unexpectedness) 때 폭발한다. 예를 들면 “사과 열 개 중에 세 개 먹으면 몇 개 남을까요?”라는 물음에 7개라고 하면 아무도 웃지 않는다. 기대에 부응한 논리적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데 한 학생의 대답, “세 개 남는다. 왜냐하면 먹는 게 남는 거니까요.” 대답을 듣는 순간 폭소가 터진다. 왜냐하면 기대를 망가뜨린 뜻밖의 대답이니까.



 “큰 웃음 하나 함께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348쪽).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은 절반으로 줄이고 은 두 배로 늘린다

시샘하면 침샘이 자극되어 침이 흐른다


한의학에서는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고 기가 통하지 않으면 불통(不通)되어 통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통증 해소를 위한 최고의 처방은 침(針)이다. 혈류가 막힌 곳에 침을 놓아 피가 잘 통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정문일침(頂門一鍼)`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정수리에 침 하나를 꽂는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는 따끔한 충고나 교훈을 이르는 말이다. 정문일침의 깨달음은 주로 낯선 환경과의 마주침에서 생긴다. 마주침이 있어야 깨우침과 가르침, 그리고 뉘우침도 생긴다. 나이가 들수록 한의원에서 가서 침도 맞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건강에 더 좋은 침은 한의사에게 맞는 침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맞는 마주침이라는 자극이다.


한의사의 침이나 정신 못 차리는 사람에게 던지는 따끔한 충고의 침이나 모두 순간은 아프지만 그 아픔을 참고 견디면 침통(沈痛)한 표정도 밝아지고 정신도 맑아진다. 건강과 직결되는 또 다른 침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침샘이 자극되어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침은 소화 작용에 없어서는 안 되는 천연 소화제다. 침은 먹은 음식물을 부드럽게 녹여 소화과정을 촉진하는 미각 촉진제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데 만약 침샘에서 침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는다면 음식 맛도 제대로 못 느낄 뿐만 아니라 위에도 좋지 못한 영향일 미친다. 군침 돌게 만드는 음식을 먹는 것도 삶에서 꼭 누려야 할 행복이다.



소화에 필요한 침은 이렇게 우리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작용하지만 반대로 시샘하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게 침이다. 이런 침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고 오히려 역기능적 폐해를 부르는 장본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침은 주로 시샘하거나 질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흘리는 타액(唾液)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선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는다. 불가능이나 한계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갖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간다. 그런데 남의 성공을 바라보며 선망(羨望)하는 사람은 다 망한다. 선망(羨望)을 구성하는 부러워할 ‘선’(羨)자를 파자해 보면 더욱 의미가 선명해진다. 남의 ‘양’(羊)을 보고 먹고 싶어서 ‘침’(㳄) 침을 흘리는 모습이 부러워할 선(羨)이라고 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침을 흘리지 않고 땀을 흘린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성공하기까지 분투 노력한 과정을 보고 교훈을 배우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의 결과만 보고 침을 흘린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에 따라 성공한 사람의 성취감도 다르다. 땀은 몸을 움직여 노동한 대가로 나오는 수고와 정성의 증표지만, 침은 힘들이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시샘과 질투의 반증이다. 이제 이런 침은 절반으로 줄이고 땀은 두 배로 늘려갈 때 우리 몸도 더욱 건강해진다.



지금 땀 흘리지 않으면 나중에 진땀 빼거나 식은땀을 흘릴 수 있다


땀은 몸을 아끼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보람과 성취의 직접적 결과지만, 침은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잔꾀를 부리면서 머리로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부수적 결과물이다. 땀은 온몸을 던져 노력한 이후 일정 시간이 흘러야 나오지만, 침은 생각만 해도 순식간에 저절로 나온다. 땀은 밖으로 흘려야 몸의 순환을 돕고, 침은 안으로 흘려야 몸의 순환을 돕는다. 땀이 안에서 고이면 찌든 때가 되고, 침이 밖을 향하면 추한 몰골이 된다. 땀은 밖으로 침은 안으로 흘러야 건강하지만 그 방향이 바뀌는 순간 위험해진다.


땀에는 염분이 있어서 짜다. 바닷물에 포함된 미량의 소금이 바닷물을 짜게 만든다. 미량의 소금이 바닷물의 속성을 결정하듯 땀방울에 함유된 미량의 염분이 사람을 썩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게 만든다. 반면에 침은 소금기가 없어서 썩는다. 땀 흘리는 사람은 그냥 썩어서 없어지지 않지만 침 흘리는 사람은 썩어서 없어질 수도 있다. 미량의 소금이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 역할을 하듯 열정적으로 몰입해서 흐르는 땀방울의 소금이 위대한 성취를 일궈내는 원동력이다.



침은 가만히 앉아서도 흘릴 수 있지만 땀은 몸을 움직여 고된 노동을 해야 나온다. 땀은 육체적 노동의 대가로 나오는 건강한 노력의 결과다. 침은 맛있는 음식을 보면 나오기도 하지만 성공한 사람의 성취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부정적인 산물이다. 앉아서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밖에 나가서 우유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이유는 땀을 흘리는 노동 때문이다. 땀은 흘리기 전까지는 힘들지만 땀을 흘리는 와중 또는 땀을 흘리고 나면 뿌듯한 보람과 성취감을 느낀다. 이에 반해 침은 본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흐르는 사심과 욕심의 부산물이다. 


남을 대신해서 땀을 흘리면 아름답지만, 남을 대신해서 침을 흘리면 추하다. 세상은 각자의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이 만들어간다. 성공하는 사람은 ‘침’을 흘리지 않고 ‘땀’을 흘린다. 뭔가 다른 사람은 자기 일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면서 ‘땀’을 흘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남의 열광하면서 ‘침’을 흘린다. 땀과 침의 차이는 결국 열정과 열광의 차이다. 열정은 내 일에 몰입하면 부산물로 땀이 흐르는 노력이지만 열광은 남의 일에 발광하면서 부산물로 침이 나오는 활동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조금 더 잘하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마음이 열정이다. 열정은 뭔가에 흠뻑 취하는 것이다. 취(醉) 하지 않으면 취(取)할 수 없다. 열정은 용광로에서 태어난다. 열정이 언제나 뜨거운 이유다. 열정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믿음 위에 피는 불꽃같은 의지다. 열정은 내가 하면 재미있는 능력, 재능을 발견할 때 더욱 뜨겁게 불타오른다. 여러분 남의 일에 발광하며 침 흘리지 말고 ‘내 일’에 몰입하며 열정을 발휘해야 ‘내일’이 새롭게 열린다.



“오늘의 당신은 당신이 흘린 땀의 양에 비례한다.”

- 흑인 최초로 미국 최고의 발레단 수석 무용수가 된 미스티 코플랜드(Misty Cope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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