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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전의 ‘답안지’가
후반전의 ‘편지지’를 찾아간 까닭

답안지에는 정답이 담기지만 편지지에는 해답이 담긴다

전반전의 답안지가 후반전의 편지지를 찾아간 까닭은?


Ama, et fac quod vis

(Love, and do what you want)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 성 아우구스티누스 -



답안지에는 정답이 담기지만 편지지에는 해답이 담긴다


전반전을 누군가 정해놓은 올바른 가치판단 기준에 비추어 앞만 보고 직선으로 달려온 사람들은 답안지 인생이었다. 답안지는 누군가 원하는 정답이 사투를 벌이는 삼국지다. 답안지는 남의 생각만 편식하는 사고의 식민지다. 답안지는 나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외면하고 기발한 발상은 무시하는 사고의 불모지이자 황무지다. 답안지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존의 진리만 기록되는 저수지다. 답안지는 전통적 불변진리만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복사지다. 답안지는 무르익어가는 내 생각으로 시너지 효과를 사전에 차단하는 억지다. 답안지는 자기 주관으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는 주체적 의지가 실종된 철부지다. 답안지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심장 뛰는 설렘이 실종된 지지부진한 삶을 살아가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흐지부지 이자 무지막지다.


편지지는 생각만 해도 이미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농밀한 연정이 스며드는 빈티지다. 편지지는 뚱딴지같은 생각도 받아들이고 숙성시키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별천지다. 편지지는 한 사람의 오래된 정성과 사랑을 숙성시켜 고유한 맛을 내는 묵은지다. 편지지는 자유의 지대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일일이 기록하며 상대를 놀라게 만드는 경천동지(驚天動地)다. 편지지는 평소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사람이나 대상 덕분에 오늘의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지덕지(感之德之)다. 편지지는 후반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나 다름없다. 자기 몸으로 체득한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사회가 정한 윤리적 판단기준이나 도덕률을 따라 답안지를 작성하지 않는다. 내 몸을 관통한 경험적 흔적이 남기고 간 감정의 얼룩에는 앓음다운 삶의 무늬로 피어나고 그곳에서 비상하는 체험적 상상력으로 편지지에 기록한다. 윤리교사가 바른말 고운 말로 충고하고 조언하는 제안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정해진 답만 기록하는 ‘답안지’보다 지금부터는 내가 쓰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절하게 쓰고 싶은 ‘편지지’를 갖고 다녀야겠다. 답안지가 요구하는 정답은 갖가지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한 가지 메시지만 문제 출제자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강조하면 된다. 편지지는 이미 누군가 장식한 글로 넘치는 신문지가 아니라 도화지다. 답안지에는 언제 하나 밖에 없는 정답이 담기지만 편지지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해답이 담긴다. 답안지에는 메시지가 담기지만 편지지에는 마사지가 담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 ‘언어를 살갗’으로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고 했다. 누군가 원하는 정답을 찾아 답안지에 쓰려고 안간힘을 썼던 전반전을 떠나보내고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나 사람에게 전율하는 감동을 편지지로 전하는 후반전을 맞이할 때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오래된 내 병은 어떤 공식을 대입해도 풀리지 않았다...슬픔의 답안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김대호 시인의 ‘나는 슬픔을 독학했다’의 한 구절이다. 전반전의 내 오십도 어떤 공식을 대입해도 그 의미가 해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저마다 살아온 삶의 맥락이 다르고 지향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똑 같이 답을 썼지만 답안지에 적힌 전반전의 삶은 누가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비록 답안지 인생을 살아온 전반전이지만 당시로서는 저마다 어쩔 수 없는 힘겨운 상황에서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힘겨운 전쟁 같은 삶이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읽은 이 책도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의 창조적 오독으로 제2의 저자가 수없이 탄생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텍스트(text)는 콘텍스트(context)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적용되는 운명을 타고난다. 켄텍스트 없는 텍스트는 의미가 휘발된 증류수에 불과하다. 전반전의 삶이 비록 답안지를 쫓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그 답안지에 적힌 모든 텍스트는 저마다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삶의 현장, 콘텍스트에서 직조된 얼룩과 무늬다.



이제 전반전의 답안지는 후반전의 편지지에게 입양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후반전의 편지지로 재탄생된 전반전의 답안지는 지난 시절의 흔적에서 삶의 교훈을 끄집어내기 위해 바쁘다. 그 교훈을 정리하기도 전에 저녁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짙은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다. 전반전에 끄적거린 전기(傳記)라도 붙잡고 후기나 부록을 추가해서 개정판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불행했던 흔적에는 바람이 불어도 휘발되지 않는 주소가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즐기는 풍경도 곤경이 낳은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생은 이제 철저하게 현재를 기점으로 미래를 재구성하는 혁명으로 다가온다. “가르침이 덤핑일 수 없듯이 배움과 성숙은 사재기가 아니다. 그것은 터지는 경험이며, 무너지는 절망이며, 부서지는 아픔이며, 아득해지는 지평이며, 망연해지는 상실인 것이다(p.85).” 김영민의 《철학과 상상력》에 나오는 말이다. 전반전의 배움과 성숙은 후반전을 살아가는 소중한 경험이며, 절망을 통해 가꿔나가는 갈망이자 견딜 수 없는 아픔의 얼룩이지만 깨달음의 무늬로 환생되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자 상실을 통해 실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만드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후반전은 전반전이 이월된 재고상품이 아니다


과거가 부실하면 미래도 부실하다. 미래를 향한 상상력은 과거의 경험적 흔적을 토대로 일어난다. 겪어본 경험이 부실하면 경험을 매개로 연상되는 상상력도 당연히 부실해진다. 비록 답안지에 답을 쓰기 위해 사투를 벌인 전반전의 삶이었지만 그렇게 살아낸 파란만장한 삶이 후반전에 파란을 일으키는 문장을 편지지에 담아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후반전의 편지지에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일에 빠져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을 기록하자. 오십 후반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만끽하는 결정적인 순간의 연속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내가 보내는 순간이 인생에서 맞이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자 돌이킬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그 순간순간을 만끽하는 주인이 내가 될 때 나는 나를 비롯해 세상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내 위에 군림했던 답안지의 윤리적 가르침과 도덕적 덕목도 니체로 말하면 사회가 정한 ‘선과 악’ 일뿐, 나에게 ‘좋고 나쁨’의 가치로 다가오지 않는다.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히 전반전이 이월된 재고상품이 아니다. 전반전에 일어났던 무수한 사건과 사고는 후반전의 편지지에 기록될 수많은 인연의 화합물이다. 예를 들면 가을에 거둬들이는 잘 익은 벼도 수많은 인연의 화합물이다. 벼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마다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가운데 벼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온도, 습도, 바람, 비 등이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일조량이 너무 적으면 벼가 잘 자라지 못하고 벼 이삭도 여물지 못할 것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홍수와 장마에 벼가 물에 잠길 수 있고, 비가 너무 안 오면 가뭄이 시달리면서 벼는 잘 자라지 못할 것이다. 벼가 무르익어서 가을에 잘 여물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해야 한다. 비가 많이 올 때 농부는 논에 물이 넘치지 않도록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물꼬를 터주어야 할 때 농부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면 벼는 물에 잠겨 잘 자라지 못한다. 



벼가 잘 익어서 농사가 잘 된 결과는 숱한 인연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적기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한 덕분이다. 비가 안 온다고 농부가 강제로 비를 올 수 있게 만들 수 없으며, 햇볕이 약하다고 농부의 인위적 노력으로 강하게 바꿀 수 없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비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필요한 시기에 자기 본분을 다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농부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 때에 하면 된다. 벼농사는 농부 한 사람의 수고와 정성으로 일궈낼 수 없는 무수한 인연이 어울려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비록 내가 하는 일이 보잘것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마지막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뭔가 잘 되면 내가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낸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나의 성취결과는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관련된 모든 직간접적인 도움 덕분이다.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수많은 인연의 화합물이 작용했다. 그렇다면 나도 남은 인생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연이라는 선물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더 좋은 인연으로 작용하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앞으로 만들어질 좋은 사이에 어떤 인연으로 작용할 것인지를 염두에 살아가는 후반전의 삶이야말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선물 같은 인연이 되고 있는지를 수시로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고 낮은 자세로 겸손함을 유지하는 후반전의의 삶을 구상해 본다. 절반으로 줄이고 두 배로 늘리는 절반의 철학도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선물 같은 인연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 내밀어 주고 따듯한 손길을 주고받는 공동체가 되는데 남은 인생을 기꺼이 투자할 때 우리는 더불어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일원이 될 것이다. 과거를 담보로 현재를 살지 말 것이며, 미래를 가불 해서 현재를 미화시키는 삶을 살지 말자. 오로지 내가 주인이 되어 나로서 살아가는 삶, 내가 하는 일과 인연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빠져 살아갈 때 우리는 모두 오성급 성공모델을 실천하며 행복한 후반전의 삶을 만끽하며 살아갈 것이다.


https://youtu.be/zEbat_e50sw?si=cdoLaPKNdgXs6Hl0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1197551

예스 24 https://www.yes24.com/eWorld/EventWorld/Event?eventno=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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