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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은 절반으로 줄이고,
관찰은 두 배로 늘린다

관성은 절반으로 줄이고관찰은 두 배로 늘린다

     


관성에 젖어 사는 사람은 흐름을 따라만 간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세상의 관성대로 흘러가는 사람, 다른 하나는 나만의 관성을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사람이다. 전자는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후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다. 물고기도 죽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대로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은 관성과 습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흐름을 읽어내고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은 습관의 코드를 읽어내서 세상의 습관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위대한 성취를 이룬 모든 사람은 습관대로 살지 않고 습관을 창조한 사람들이다.


관성대로 살아가지 않고 세상의 작은 흐름을 관찰하는 사람은 습관의 물길이 향하는 곳에 존재하는 답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세상의 흐름을 뒤집는 사람은 기존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또 다른 관성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세상은 다시 두 가지 사람으로 재분류된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습관을 바꾸거나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흐름에 휩쓸려가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습관을 바꾸거나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만든 관성을 따라가는 사람은 습관의 관성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미리 감지하는 사람이나 습관이 형성할 관성의 방향을 바꾸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관점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인지상정(人之常情)에서 비롯된다. 인지상정 없는 기상천외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생각일 뿐이다. 이전과 다른 인생 후반전을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익숙했던 일상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관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인생 후반전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통찰이 넘치기 시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먹다가 버리는 밥 한 톨에 담긴 의미를 관찰해 보자. 밥의 원료인 쌀을 의미하는 한자 ‘미’(米) 자는 열십자(十)를 중심으로 상단과 하단에 각각 여덟 팔자(八)가 있는데 상단의 여덟 팔자(八)는 거꾸로 뒤집혀 있고 하단의 여덟 팔자(八)는 똑바로 서 있다. 즉 쌀 한 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농부가 88방울의 땀방울을 흘려야 한다는 의미다. 


관습도 습관의 산물이다.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생긴 관성이 제도적 관행으로 굳어진 게 바로 관습이다. 무지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게 없다’는 이 말도 사실은 노력과 습관의 결과라고 한다.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무지라는 것이다. 관성대로 사는 습관도 저절로 생긴 산물이 아니다. 그걸 매일 반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을까. 이걸 운동으로 바꿔도 일맥상통한다. 운동하지 않는 사람이 주로 머무는 곳은 의자다. 의자에 의지할수록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생각을 거듭한다. 그러다 운동하지 않는 관성대로 살면서 운동하지 않는 습관이 일상이 된 것이다.



오십에 갖추어야 할 5가지 관찰법


오감(五感)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관심’ 있게 ‘관찰’하면 ‘관철’시킬 고유한 자기주장이 생기고,  다양한 의견을 평정, ‘관통’할 수 있는 ‘관록’이 생긴다. 관록이라는 저력과 내공을 갖기 위한 첫 번째 출발점은 관심이다. 관심은 선택과 포기 사이에서 결정된다. 관심은 애정을 동반하면서 비교적 오랫동안 대상이나 사물을 관찰한다. 관찰이 이전과 다른 통찰을 낳는다. 관찰로 생긴 통찰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신념을 낳는다. 관철시키는 통찰력은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포착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관통하는 원리는 기존의 관례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사고논리를 개발한다. 관심과 관찰, 관철과 관통은 힙을 합쳐 대체 불가능한 관록을 만들어낸다.



① 관찰자는 타인의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관심을 지켜간다.

세상에는 남의 관념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남들의 좋은 생각에 빠져 살면서 자기 생각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세상의 아무리 좋은 생각도 나의 신념으로 재무장해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관심으로 세상을 재해석해내는 사람이다. 


관찰자는 세상을 앉아서 ‘관망’ 하지 않고 애정으로 관찰한다.

관찰자는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앉아서 관망하거나 관람하지 않는다. 평범한 세상, 익숙한 세상에도 질문을 던져 낯설게 생각하면서 깊이 관찰한다. 관찰자의 색다른 통찰은 모두 이런 관찰에서 비롯된 체험적 깨달음이다. 그들은 사소한 일상도 색다른 관점으로 관찰해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얻는다. 


관찰자는 관성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주관으로 관철시킨다.

관찰자는 가장 경계하는 점은 남들이 만든 관성대로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관찰자에게 관행이나 관습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관성이 습관적으로 만들어온 고정관념이나 타성을 깨부수고(break) 새로 만들(make) 때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고 믿는다. 관찰자는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습관코드를 읽어내서 자신의 주관을 관철시키는 사람이다.



관찰자는 관례(慣例)’대로 살지 않고 관통(貫通)’하는 원리를 찾아낸다.

관찰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관례에 없다는 말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관례에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반대나 저항을 표시하는 사람들이다. 관례대로 행동하는 사람, 판례대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치고 창의적인 사람은 없다. 세상에 이로운 가치를 추가하는 사람은 원래대로 실행되어 온 관례에 없던 새로운 사례를 추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관통하는 원리에 비추어 전례 없는 새로운 가치를 제안한다. 


관찰자는 관리’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자기만의 관록으로 차별화시킨다.

관찰자는 매뉴얼을 싫어한다. 매너 있게 새로운 일을 시작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매뉴얼을 참고하기 시작한다. 매뉴얼의 친구는 매너리즘이다. 매너가 매너리즘으로 바뀌는 순간 세상은 틀에 박힌 마침표로 얼룩진다. 관찰자는 틀에 갇힌 사고방식대로 관리하는 스타일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관으로 쌓아온 관록으로 밀고 나간다.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지니는 관록의 흔적을 세상 사람들은 기록하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25쪽).


-장 그르니에의 《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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