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가르치지 말고
‘방향’을 가리켜라!

‘방법’을 가르치지 말고 ‘방향’을 가리켜라!


가르치면 모범생을 기를 수 있고

가리키면 모험생을 기를 수 있다!


기업에서 가르친 경험을 포함하면 가르치는 업에 몸담은 지 어언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방법을 가르쳐왔는가 아니면 방향을 가리키려고 노력해왔는가? 가르치면 모범생을 길러낼 수 있지만 가리키면 모험생을 길러낼 수 있다. 모범생은 범생이다. 말은 잘 듣는다. 시키는 일도 곧이곧대로 잘 따라 한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알아서 추진해보라고 하면 겁을 먹는다. 모범생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의식도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모범답안을 찾는데 열중한다. 틀 밖에서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뜻밖의 질문을 하지 못한다. 학부모들은 자식이 커서 모범생이 되기를 원한다. 남이 걸어간 길, 안전한 길을 따라 별 탈 없이 잘 자라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버지가 의사면 자식도 의사, 판검사면 판검사, 교수면 교수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전과목 공부를 잘하는 선수가 되는 다양한 과정을 거친다. 모범생은 부모나 선생님의 칭찬을 먹고 자란다. 정해진 범위 내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 칭찬을 받고, 그렇지 기대하지 않은 일, 엉뚱한 일, 예상을 벗어나는 일을 하면 야단을 맞는다. 그래서 정상 궤도 안에서 별 다른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


이에 반해서 모험생은 주어진 길, 남이 걸어간 길을 뒤쫓아 따라가는 과정에 별 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은 성공한 사람의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험생은 무엇보다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자신의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해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곳, 읽어보지 않은 책, 보지 않았던 영화 등을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다. 색다른 도전을 즐기면서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스스로 찾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는 가능성의 한계 지점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모험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재미있게 즐긴다. 그것이 비록 돈이 안되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험생은 오로지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모험생은 색다른 질문을 먹고 산다. 이전에 성취했던 결과도 지금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묻는다. 모험생은 뜻밖의 결과를 찾기 위해 틀 밖에서 질문하고 관찰하고 탐색하는 일에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가르침은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가리킴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방법을 가르치면 쉽게 따라서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자생능력은 점차 상실된다. 구체적인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방향을 찾으려는 의지를 희석시키는 장본인이다. 그래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가르치면 삶을 그르칠 수 있다. 방향을 가리키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방향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방향을 가리키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 자신을 스스로 키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삶을 그르칠 수 있는 방법을 너무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지나친 보호막 속에 가두고 사육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육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생능력을 심어주는 활동이지만 사육은 가급적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약을 주입하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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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다’는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 배우게 하다는 말이다. ‘가리키다’는 '가르치다'의 잘못된 표현이다. 예를 들면 ‘동생을 가리켰다’가 아니라 ‘동생을 가르쳤다’가 맞는 말이다. ‘가르치는’ 일에는 언제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부어야 한다. 성의 없이 대강 대충 가르치면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대강 대충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가르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특정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 거기에 담긴 철학과 신념, 특정 지식을 얻는 동안 고뇌했던 체험적 열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받는 감동은 ‘가르침의 기교’에서 오지 않고 가르침에 임하는 스승의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가르치다’라는 말과 혼동될 수 있는 말이 바로 ‘가리키다’이다. 즉 ‘가리키다’는 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말이다. 무언가를 지칭할 때나 방향을 제시할 때 쓰는 표현이 바로 ‘가리키다’이다. 스승은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다. ‘가르침’은 곧 ‘가리킴’이다. ‘가르침’은 곧 ‘가리킴’이기 때문에 잘 못 ‘가르친다’는 것은 곧 방향을 잘 못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승이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실수는 제자들이 나아가야 될 방향을 잘 못 ‘가리키는’ 것이다. 스승이 있는 곳에 '道'가 있고 '道'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 길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는 것이다. 스승은 길의 방향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 길에 도달하는 방법은 제자들의 몫이다. 깨달을 ‘각’(覺)자를 보면 먼저 ‘배워서’(學) ‘본다’(見)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가르침’을 받고 방향에 대한 ‘가리킴’을 받으려면 먼저 배워야 큰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다. 궁극적으로 길을 찾고 길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은 자신이다.


한편 ‘그르치다’는 「…을」 잘못하여 일을 그릇되게 하다는 의미다. ‘그르치다’는 한자로 ‘誤’(그르칠 오)라고 쓴다. 가르치면 긍정적으로 사람이 바뀌지만 그르치면 사람은 잘 못을 저지를 수 있다. 멍청한 ‘의사’ 한 명은 환자 한 명을 죽일 수 있지만, 멍청한 ‘교사’ 한 명은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스승이 ‘가리키는’ 길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방향을 잘못 가리키면 내용을 잘 못 ‘가르치는’ 것보다 그 파급효과가 훨씬 막대하다. 잘 못 가리킨 방향을 믿고 쫓아갔다가 엄청난 역기능적 폐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결연한 감행을 거듭하고 있는가? 내가 걸어가는 길의 방향을 가리켜주면 나 스스로 그 길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 나서고 있는가? 아니면 그 길을 떠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가르쳐주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가르침’과 ‘가리킴’의 궁극적인 성패는 ‘가르침’과 ‘가리킴’의 대상자인 제자 자신이다. 스승이 가르치고 가리킨 길 위에서의 성패 여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가르치는’ 일에는 언제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부어야 한다. 성의 없이 대강 대충 가르치면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대강 대충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가르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나 가치관을 근간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정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 거기에 담긴 철학과 신념, 특정 지식을 얻는 동안 고뇌했던 체험적 열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받는 감동은 ‘가르침의 기교’에서 오지 않고 가르침에 임하는 스승의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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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쳐야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음’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깨달음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깨달음에 담긴 우리말 고유의 의미를 알면 이해가 갈 수 있다. ‘깨닫다’는 ‘깨다’와 ‘닫다’가 어우러진 말이다. ‘깨다’는 잠에서 깨어나고 꿈에서 깨어나고 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현실에 다시 눈을 뜨고 건너오는 노릇이다. 즉 ‘깨다’는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술에 취한 듯이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질의 삶으로 건너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닫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간다’는 뜻이다. 가야 할 곳,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힘껏 내달린다는 뜻이다. 결국 ‘깨닫다’는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질의 삶으로 건너와서(깨다) 곧장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내달린다(닫다)는 뜻이다.


‘깨닫다’는 ‘알다’와 질적으로 다르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며, 입으로 맛보고, 코로 맡고, 귀로 들어가면서 부지런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길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깨달음’은 노력한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깨끗하게 비워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노릇뿐이라고 한다. 변덕스럽게 줄곧 날뛰는 ‘느낌’도 눌러 앉히고, 쉴 새 없어 허둥대며 헤집으려고 드는 ‘생각’도 잠재우고, 불쑥불쑥 고개 들고 일어서는 ‘뜻’도 잘라버리고, 그런 후에 그것들이 가라앉아 거울같이 고요해진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깨달음’을 만난다고 한다. 참된 ‘깨달음’에 이르려면 우선 ‘깨우침’을 쌓아야 되고, ‘깨우침’이 쌓이면 ‘깨침’에 이르고, ‘깨침’을 거듭 쌓다 보면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깨우치다’는 다른 사람의 힘으로 깨어나는 것이지만 ‘깨치다’는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다. 즉 ‘깨우침’은 수동적․타율적으로 오지만 깨침은 능동적․자발적으로 온다. ‘깨치다’는 ‘깨다’와 ‘치다’가 합쳐진 말이다. 여기서 ‘치다’는 북을 치고 종을 치는 것처럼 ‘깨다’에 힘을 보태는 도움 가지다.


깨닫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영위하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다. 문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별 다른 노력 없이 쉽게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과 기술을 알고 싶어 한다는 데에 있다. ‘깨달음’은 각고의 노력 끝에 불현듯 찾아온다. 안 들리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리는 것처럼 깨달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선 무지몽매한 자신을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부터 무수히 깨지는 깨우침을 얻어야 한다. 자신이 깨지는 깨우침을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해서는 깨우침이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다. 깨우침은 깨짐의 결과다. 깨지는 깨우침 덕분에 스스로 자신을 깨뜨리는 깨침이 찾아온다. 즉 깨침은 깨뜨림의 결과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다 보면 깨침이 슬며시 다가온다. 깨침이 축적되다 보면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와 기뻐 날뛰게 만든다. 깨달음은 또 다른 깨달음에 의해서 무참히 깨지고, 또 다른 깨우침으로 자신을 부단히 깨뜨리다 보면 새로운 깨침이 온다. 이런 깨침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깨달음을 선사해준다. 결국 깨우침과 깨침, 그리고 깨달음은 종착역이 없는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이다.


깨우치는 가르침과 깨닫는 배움의 과정도 미완성이라야 희망이 자랄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스스로 부족하기에 더 배워야 된다는 겸손함을 유지하고,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초보자라는 생각을 갖고 진심 전력해서 배움의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배워서 가르치는 것이고,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다. 가르침은 배움을 전제로 한다. 가르치면서 학생들로부터 받는 피드백으로 깨우치고, 이전과는 다른 생각과 인식의 깊이로 깨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이 또한 가르침의 소중한 원료로 쓰인다.


‘깨우치는’ 교수법이 있어야 ‘깨치는’ 학습법’이 따라온다. ‘깨우침’이 있어야, ‘깨침’이 따라오고, ‘깨침’이 있어야 ‘깨달음’이 따라온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다. 가르침과 배움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가르치는데 배울 의욕과 열정이 없다면 가르침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 없는데 배우려는 사람만 의욕이 강하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현상이 될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도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밖에서 쪼는 사람은 스승이고, 안에서 쪼면서 알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은 학생이다. 알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다만 어미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과정을 도와줄 뿐이다. 가르침과 배움도 고장난명과 줄탁동기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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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은 ‘나처럼 해보라’고 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해보자’고 한다!


해적처럼 가르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야 될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방향을 모색하고 나면 무엇을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방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지혜는 혼자 터득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때 뜻밖에 다가오는 통찰이자 직관이다. 깨달음은 온몸으로 부딪히고 때로는 넘어지면서 체득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불현듯 다가오는 지적 희열이다.


교수법은 남이 가공해놓은 또는 자신이 편집․가공한 지식을 완결된 형태로 전달하는 과정이나 기법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 직접 체험했거나 남의 체험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무수한 실천, 여기에 동원되는 아날로그적 고통 체험이 공유․교감되는 과정이다. 교수법의 핵심은 먼저 도착하는 상쟁 기술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남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상생 원리를 터득하게 하는 옆을 보는 지혜를 체득하게 하는 데 있다. 때로는 정답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똑바로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서성거릴 필요가 있으며, 거기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곡선의 여유로움과 함께 치열함이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작금의 교수법은 학습자로 하여금 걸어보기도 전에 목적지에 놓여 있는 답을 찾아 주는가 하면 거기에 보다 빠르게 도달하는 효율적인 방법적 처방전을 제시하는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천천히 여유(裕)를 갖고 직접 자기 몸(體)을 움직여 그 답을 찾아보는 가운데 가슴 뭉클한 감동(感)이 따라오는 것이다. 몸으로 체험(體)하면서 깨달은(認) 지식(知), 체인지(體認知)만이 나를 체인지(change)하고 주변을 넘어 세상을 체인지(change) 할 수 있는 지식이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수영 강습장에서 수영 이론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수영을 곧 잘하지는 못한다. 수영은 물에서 영법을 직접 몸으로 익혀야 실제로 할 수 있다. 물의 깊이와 물의 흐름, 그리고 바람과 물이 만나 요동치는 물결이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서 직접 몸으로 모든 감각을 익혀야 한다. 뛰어들어 행동하지 않으면 의식은 그대로 잠자고 있다. 수영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은 ‘나처럼 해봐’라고 강요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고 조건을 만들어주며 말없이 지원해준다.


들뢰즈에 따르면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과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이 있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은 가르치는 전문가의 전문성이 배우는 비전문가의 기준이자 정답이다. 전문가가 지니고 있는 전문성을 비전문가는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전문가는 비전문가에게 어떻게 전문가의 전문성을 습득할 것인지를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 실무적 지침이 들어있는 매뉴얼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라 할 것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서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은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에게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노하우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전문가의 전문성은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습득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가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상적으로 지향해야 될 기준이나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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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라는 말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지는 『지식의 쇠퇴』라는 책에서 누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teaching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teaching은 답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스승이 학생을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행위다. 그런데 그가 최근 쓴 『난문쾌답』이라는 저서에서도 주장하는 바와 같이 ‘답이 없는 시대’에는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헤매는 방법밖에 없다.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다양한 탐험과 시도를 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대안을 찾아 나서는 배움의 여정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나와 함께 해보자는 가르침의 방법이다.


진정한 스승은 “나처럼 해봐”를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는 자다. 내가 비록 상대보다 전문가적 자질이나 역량이 뛰어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체득하고 있는 전문성을 비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나처럼 해보라’고 강권을 한들 나처럼 되지 않는다. ‘나와 함께 해보자’는 교육은 스승인 전문가가 제자인 비전문가를 어제와 다른 현명한 답을 찾아 어제와 다른 지식의 바다로 깊이 잠입하여 스승이 축적하고 있는 전문성보다 더 차이가 나는 지식과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격려하고 배려해주면 촉진해준다. 미래의 스승은 자신의 전문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나처럼 해봐’라고 지시하고 명령하며 나처럼 하지 못한 비전문가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전문가가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스승은 ‘나와 함께 해보자’고 참여를 독려하고 적극적인 탐구를 조장하는 전문가다.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추구하는 답은 정보의 바다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지식의 바다에도 없다. 답이 없는 상황, 또는 답이 쉽게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언제나 낯선 세계를 탐구하면서 어제와 다른 차이를 생성하는 새로운 지식을 부단히 만들어나갈 뿐이다. ‘나와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는 스승은 어제와 비슷한 정보의 바다에서 스승이 발견한 정보와 동일한 정보를 찾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스승은 기존의 앎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낯선 세계로 부단히 인도함으로써 기존의 고정관념과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진정한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기존 인식의 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차이를 반복해서 생성하는 과정으로 빠져들게 만들면서 열정을 불태우게 만든다. 스승은 제자보다 더 열심히 어제와 다른 차이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정보의 바다, 어제보다 더 낯선 지식의 바다에 빠뜨려서 스승보다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창조할 수 있도록 부단히 격려하고 지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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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 시작해서 열광으로 마쳐라!


『장인』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세넷은 장인을 어제와 다른 질적 도약을 위해 언제나 조금 더 잘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인에게 100% 만족이란 없다. 언제나 어제보다 또는 전보다 조금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내일의 발전과 도약을 위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노력하는 것이다. 내일이 되면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어제보다 더 애를 쓰는 것이다. 전문성의 축적과 심화를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과정은 그래서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이다.


검도에서 무공을 닦는 3단계 과정인 수파리(守破離) 과정을 거치면서 무림 지존에 이르는 과정 역시 영원한 미완성이다. 매 순간, 이전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과정이다. 그 과정의 아름다움이 결국 결과의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미완성(未完成)은 미완성(美完成)이다. 수파리의 첫 번째 단계인 ‘수(守)’는 ‘가르침을 지킨다’라는 의미로서 사부가 가르친 기본을 철저하게 연마하기 위해 지루한 반복을 거듭하는 단계다. 여기서 지루한 반복은 어제와 비슷한 단순 반복이 아니라 들뢰즈 용어로 이야기하면 어제와 다른 차이를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다른 반복이다. 두 번째 ‘파(破)’는 원칙과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개성에 따라 독창적인 응용 기술을 창조하는 단계다. 마지막 단계인 ‘리(離)’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신기의 세계로 입문하면서 스승과 이별하는 단계다. 스승보다 나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단계로 도약하는 단계다. 기본기를 닦는 수의 단계를 거쳐 창조적 응용동작을 하는 파의 단계를 통과하면 비로소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밀병기로 스승과는 또 다른 길로 입문하는 ‘리’의 단계, 그 끝은 없다. 영원히 순환하고 반복될 뿐이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어제보다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애쓰는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인 셈이다.


해적처럼 가르친다는 것은 해적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와는 무관하다. 오직 해적의 정신과 관계가 있다. 대담하고 모험을 즐기며,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도 미지의 땅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해적처럼 제자들을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과감한 추진력과 결연한 용기를 강조한다. 해적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상식에 시비를 거는 몰상식한 발상, 정상에 물음을 던지는 비정상적인 질문, 고정관념과 타성의 틀을 깨는 뜻밖의 도전을 즐기는 것이다. 그들은 습관의 덫에서 빠져나와 관례나 관행을 거부하고 언제나 이전과 다른 시도를 즐긴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지구 끝까지라도 가는 해적처럼 진정한 스승은 기존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잘 따라 하는 모범생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가를 육성하는데 관심이 많다. 해적 정신을 본받은 용기 있는 스승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가치관에 얷매여 살지 않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세상을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험생을 선호한다.


이 책은 해적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IRATE의 이니셜을 활용하여 해적처럼 가르치는 철학과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가르치는 교사의 열정(Passion) 없이 학생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없다. 열정을 몰입(Immersion)을 동반한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데 외나무다리 건너편에서 교사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방법을 아무리 구체적으로 열정적으로 가르쳐도 학생을 따라오지 않는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처럼 해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다. 학생들과 인간적 신뢰관계(Rapport)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말로만 주장하고 강조해서는 학생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서로 간의 믿음은 지행일치(知行一致)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지행일치는 말한 다음 행동하는 것이지만 지행합일은 말은 곧 행동이고 행동이 곧 말인 것이다. 지행일치가 언행일치를 강조하면서 행동하기 이전에 알아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지행합일은 삶 속에서 앎이 형성되고 앎이 곧 삶이 경우다. 진정한 스승은 먼저 안 다음 행동하는 지행일치보다 일상적 삶 속에서 앎을 추구하고 앎이 곧 삶인 지행합일을 추구한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스승과 제자는 튼실한 인간관계 속에서 굳건한 신뢰의 꽃을 피우면 배움의 바다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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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적 관계 맺음으로써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질문과 분석(Ask and Analyze)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과감하게 도전한다. 스승의 역할은 정답을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올바른 질문을 통해 전대미문의 현답을 찾아 나서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촉진해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전과는 다르게 변신(Transformation) 하는 과정을 통해 부단한 탈바꿈을 시도한다. 스승으로서의 탁월함은 삶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갖는 것에서 시작하고, 열광(enthusiasm)를 통해서 자리를 굳힌다고 저자는 말한다. 열광은 9회에 등장해서 경기를 끝내는 마무리 투수라는 것이다. 스승의 임무는 현란한 어휘를 구사하면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스스로 모델이 되어 학생들의 잠재능력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스스로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열정으로 시작해서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앎과 삶이 일치되는 지행합일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가르침이자 가리킴이다. 열정(熱情)이 시작단계에서부터 비교적 오랫동안 흠뻑 빠져드는 에너지라면 열광은 학생들을 순간적으로 몰입시켜 폭발하는 광기에 가깝다. 열정은 꿈이 목표에 대한 비교적 지속적인 에너지이며, 열광은 특정 사안이나 사태에 대해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흥미나 광기 어린 에너지를 지칭한다. 열정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헌신적인 에너지가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되는 감정이라면 열광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에 대한 고조된 흥분상태를 지칭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비교적 오랫동안 열정으로 즐길 수 있지만 그 일에 대해 오랫동안 열광할 수는 없다.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설득하면 행동으로 옮긴다!


가르침은 기술이나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열정, 그리고 열정의 꽃을 피우려는 열의의 문제다. 열정과 열의가 있는 스승은 남의 지식을 활용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비록 나의 지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 생각은 어떤지, 그 지식과 관련된 나의 체험적 사례나 깨달음은 무엇인지를 추가하지 않으면 지식은 지루한 한 끼의 식사에 불과할 것이다. 뱀장수는 뱀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뱀에 대한 자신의 신념으로 '설득'한다. 진정한 스승은 타인의 개념에 나의 신념을 추가해서 열정적으로 설득한다. 인생은 설득의 연속이다. 내가 누군가를 설득해야 되는 상황도 있고 역으로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설득당하는 경우도 있다. 기업은 고객을 설득하고, 정부는 국민을 설득하며, 리더는 팀원을 설득하고, 선생님은 학생을 설득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설득’보다 ‘설명’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훌륭한 논리적 설명은 이성을 움직이지만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게 만드는 감성을 움직이지 못한다. 설명해서 이해하면 머리는 끄덕이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설득해서 감동을 받으면 행동한다.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설득해서 감동시키는 것이다. 설명은 자신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지식으로도 가능하지만 설득은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체험해보지 않고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명은 머리로 하지만 설득은 가슴으로 합니다. 그래서 설명은 이성과 짝을 이루고 설득은 감성과 짝을 이룹니다. 설명은 논리적이라는 말이 어울리고 설득은 감성적이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논리적 설명과 감성적 설득은 조화를 이루지만, 논리적 설득과 감성적 설명은 왠지 부자연스럽습니다. 설명은 논리적으로 머리를 자극하지만 설득은 감성적으로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설명’하면 머리가 움직이지만 ‘설득’하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움직일 경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골 때린다는 표현을 씁니다. 마음으로 호소해서 동정심을 얻거나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일관하면 이해는 시킬 수 있지만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감성적 설득 없이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어진다. 이해는 가지만 재미가 없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설명만 일삼으면 골 때리지만 감성적으로 설득하면 눈에 광채가 난다. 의미가 머리에 계속 꽂히면 골 때리지만, 의미가 심장에 꽂히면 의미심장해진다. 감성은 대상에 대한 가장 정직한 느낌이다. 머리로 판단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먼저 느낀다. 느낌이 와야 논리적 설명을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느낌이 오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포기한다. 거기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상대방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당연히 소통(疏通)은 단절되고 불통(不通)되며, 심지어는 분통(憤痛)이나 울화통이 터진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고 타당한 설명이라고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은 결론을 낳지만 감성적 설득은 행동을 낳는다. 결론은 설명이 낳은 자식이지만, 행동은 설득이 낳은 자식이다. 설명하면 이해는 가지만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명이 끝나면 모두가 머리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지만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은 논리가 필요하지만, 설득은 신념이 필요하다. 신념 없는 논리는 공허한 관념으로 비칠 수 있다. 설명하는 사람은 메시지에 집중하지만, 설득하는 사람은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집중한다. 설명은 메시지를 팔지만, 설득은 메신저를 한다. 설득하는 사람은 메시지 자체를 파는 게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판다. 설득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신뢰를 심어주고 결단을 촉구하며 결연한 행동을 유발한다.


뱀장수는 뱀을 팔지 않고 뱀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판다. 뱀장수는 뱀의 약효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뱀의 약효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갖고 감성적으로 설득한다. 자신이 직접 먹어본 것처럼 자신의 체험담으로 고객들의 마음을 훔친다. 우선 고객의 마음을 휘저은 다음 서서히 뱀의 약효에 대해서 논리적 설명을 덧붙인다. 설득이 먼저고 설명이 나중이다. 이성적 또는 논리적 설명과 감성적 설득은 새의 양 날개처럼 언제나 조화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문제는 논리 이전에 감성이, 설명 이전에 설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설득당한 사람에게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빠져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책은 속수무책이다. 속수무책이라는 책을 읽으면 대책이 없다. 일단 설득에 넘어가 빠진 사람은 빠져나오기 어렵다.


물건을 훔치는 도둑은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훔치는 도둑은 법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아니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 상대의 마음을 훔치는 전략은 그래서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치외법권적 유혹 비법’이다. 유혹의 달인은 차가운 논리적 이성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뜨거운 감성적 마음으로 설득한다. 설득이 무르익을 무렵 설명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설득으로 문을 열고 설명으로 열린 문을 닫아버린다. 닫힌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제 설득한 사람의 논리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설득’ 없이 ‘설명’ 한 적이 많은가? 아니면 ‘설득’한 다음 ‘설명’하는 일이 많은가? ‘설득’ 없는 ‘설명’은 지루하고 ‘설명’ 없는 ‘설득’은 위험하다! 먼저 ‘설득’하고 나중에 논리적 ‘설명’으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설득’ 없는 ‘설명’, ‘설명’ 없는 ‘설득’ 모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먼저 ‘설득’하고 나중에 ‘설명’하라! ‘설명’을 최소화하고, ‘설득’은 극대화하는 방법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유혹(?)의 지름길이다! 유혹은 ‘설득’으로 시작해서 ‘설명’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마음 사냥꾼이다. 진정한 스승은 남이 만든 개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으로 깨달은 신념과 용기로 설득한다. 지식에 자신의 열정과 열의, 신념과 용기를 심어 제자들의 배우려는 욕망에 불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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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할 수 있는 용기(勇氣), 미칠 수 있는 패기(覇氣)


“진리의 빛을 쏘이려면 용감하게 거짓의 어둠 속을 뚫고 나와야 한다. 진리 행위의 빛은 용기를 심지로 해서 타는 불에서 발생한다. 작은 인식으로부터 큰 인식에로의 확장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식의 여백 에로 나오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고통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씨이다. 용기는 저항이며 용기는 거절이다. 용기는 거짓 무(無)에 대한 거부다. 속임수를 거부하지 않고서 진리의 불빛을 쏘일 수 없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용기'와 '정신적 파괴력'은 고통의 감옥 벽을 부수고 나온다. 용기는 무지에서 나올 수 없다. 용기는 사실에 관한 참된 지식에서 나온다... 사실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이미 용기의 심지를 적셔놓고도 남음이 있다... 용기 없이 지혜 없고 지식 없이 용기 없다.” 월북 철학자 윤노빈의 『신생철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식에 용기가 빠진다면 그 지식은 학생들의 용기 있는 결단을 촉구할 수 없다. 교수법의 핵심은 가르치는 사람의 목소리와 사연, 체험과 열정, 주관과 해석이 가미된 지식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다. 사상이 사상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갖으려면 사상에 나의 느낌과 아픔을 가미해서 내가 실천한 체험적 스토리가 가미될 필요가 있다. 용기를 의미하는 ‘courage’라는 말은 가슴을 뜻하는 ‘heart’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논리적 설명도 중요하지만 감성적 설득이 중요한 이유는 머리로 이해된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가슴으로 와 닿지 않으면 실천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학생들을 이해시켰지만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실천으로 연결될 수 없다.


여기서는 필자의『용기』라는 책에 제시된 7가지 위기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7가지 용기를 근간으로 교수법이 용기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논의해본다. 앞단에 나오는 사자성어는 위기를 지칭하고 후단에 나오는 사자성어는 위기를 극복하는 전략이나 용기를 지칭한다. 해적처럼 가르친다는 말은 결국 용기 있는 지행합일을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 본받을 수 있도록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향을 모색하며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몸으로 체득한 체험적 노하우를 나눈다는 말이다.


①진퇴양난(進退兩難)의 난국을 대사대성(大思大成)의 꿈으로 극복하라.

오도 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크게 생각하고 크게 이루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생들이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는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을 때 옆으로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용기 있는 교수법의 진면목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도달할 수 있는 큰 꿈과 생각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꿈의 크기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②백척간두(百尺竿頭)의 역경을 즉행집완(卽行集完)의 행동으로 벗어나라

높디높은 두려운 상황에서도 즉시 행동해서 완성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백척간두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목적이나 경지(境地)에 도달하였어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노력하는 데 있다. 어려운 도전과제에 처해있는 학생들이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해결 대안을 갖고 만족하고 있을 때, 그리고 오랜 장고 끝에 악수를 두려고 하는 학생들을 독려하여 지금보다 좋은 대안을 찾도록 결연한 행동을 촉구하면서 용기를 북돋우는 교수법이 필요하다.

③누란지세(累卵之勢)의 파국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자세로 돌파하라

계란을 쌓아 올린 듯 긴장된 상황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계란을 쌓는 과정에서 계란을 깨질 수 있으며, 계란이 깨지면 다시 쌓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바람에 들풀의 줄기가 휘어지지만 결코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들풀의 지혜를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노력이 중요하다.


④여리박빙(如履薄氷)의 위기를 불포가인(不抛加忍)의 인내로 타개하라.

살얼음판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포기 대신 인내를 더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대안을 찾아보는 노력을 장려해보는 가르치는 사람의 노력이 중요하다. 불가능한(Impossible) 상황에서도 가능성(I'm possible)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교수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⑤설상가상(雪上加霜)의 협곡을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의지로 돌파하라.

어려움이 가중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처음의 열정을 되새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에게만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기보다 문제가 발생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깨닫도록 지도하는 교수법이 필요하다. 설상가상의 협곡에서 좌절하지 않고 협곡을 건널 때의 처음 마음을 되새겨 볼 때 새로운 의지와 용기가 생겨날 것이다.


⑥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을 배수지진(背水之陣)의 전략으로 타파하라.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듯 긴박한 상황에서도 배수의 진을 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발생해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결연한 용기를 갖고 임하면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교수법이 필요하다. ‘한 번만’이라는 말을 남발하면서 위기를 모면하기보다 ‘한 번 더’라는 말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결연한 자세를 취해보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준다면 격랑의 파도 뒤에 평온한 바다의 고요함을 즐길 수 있음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⑦일촉즉발(一觸卽發)의 난관을 현존임명(現存任命)의 결의로 굴복시켜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도 현재의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창조적 긴장감은 새로운 대안을 찾는 원동력이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돌파구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창조적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은 더 나은 새로운 대안을 찾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재해석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과거는 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가용한 자원을 활용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는 교수법이 필요하다.


가르침의 본질은 바로 지식의 전달보다 지식에 용기를 담아서 어려움과 두려움을 학생들 스스로 극복하도록 고무해주고 장려해주는 데 있다. 지식보다 용기가 중요하다. 기존 지식이 용기를 내는데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고 디딤돌로 작용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고 가리킴의 본질이 아닐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패기가 필요하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과감하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패기야말로 모든 스승이 지향해야 될 가르침이자 가리킴이 아닐까? 용기 있는 스승 밑에서 용기 있는 제자가 나오고, 패기 넘치는 스승 밑에서 패기 넘치는 제자가 탄생한다. 진정한 용기는 남들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과감하게 선택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전대미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함께 걸림돌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꿀 수 있는 굳센 정신이나 기상, 즉 패기만 있다면 누구나 해적처럼 가르칠 수 있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가려는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이 글은 무엇이 수업에 몰입하게 하는가라는 책의 감수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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