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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농부가 되었습니다

호호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농부의 시선

   5년 8개월여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직할 곳이 정해졌다거나, 할 일이 뚜렷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었던 모든 것에 도전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던진 사직서였다.


   처음 입사했을 당시의 안정감을 잊을 수가 없다. 취준생 시절의 모든 고민과 방황을 훌훌 털어버리고 취직이라는 것을 했을 때는 앞으로의 길이 다 닦여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적금을 보며 뿌듯했고, 여유로운 생활비로 적절히 스트레스를 푸는 삶을 즐겼다.


   나름 안정적이라는 회사에서 잘 적응하며 나는 매사에 그렇듯 ‘열심히’ 일했다. 요령을 피울 줄도 몰랐고, 상사에게 아첨을 부릴 줄도 몰랐으며, 그저 내 성격대로 묵묵히 꾸준하게 일을 했다. 그렇게 3년쯤 지나니 갈수록 일이 고되져서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지나니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 3개월, 1년, 3년이 고비라고 하는데, 나름 오래 버텼다 싶을 즈음인 3년째 첫 슬럼프가 왔을 때부터 곰곰이 고민하고 재보기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 버텨야 하는 이유들과 나를 힘들게 하는 요인에 대해서.


   첫 직장인 데다가 외국계 기업이니 이건 결코 힘든 게 아니라고, 친구들을 만나 또라이 상사 이야기를 들을 때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정신 차리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만한 회사는 없다고, 나는 이 안에서 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웠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며 내게 메인 족쇄를 다시 조였다.


   하지만 회사를 조금 더 즐겁게 다니려면 앞으로 어떤 커리어 패스를 만들면 좋을지 고민해야 했다. 매니저가 될까, 본사에 들어가서 제품 디자이너를 할까, 부서를 아예 바꿔볼까, 이런저런 선택지를 두고 요리조리 맞춰봐도 도저히 나에게 꼭 맞는 퍼즐 조각은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디자인 일에 흥미가 많이 떨어져 버렸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야 하는지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목표가 없으니 더 이상 일을 지속할만한 힘이 생기지 않았다.


   그 즈음, 키우던 고양이가 하늘나라로 떠나 땅에 묻어주고 나니, 내가 사랑하는 존재와 나조차 결국에는 돌아갈 이 땅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원래도 자연을 좋아했고, 사진을 찍으며 전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남기는 것이 취미였는데, 이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여러 다큐멘터리와 환경 영화, 도서들을 뒤적거리며 하나둘씩 공부를 해보니,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세상의 어두운 모습들은 모두 감춰져 있었고, 정부와 기업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보도록 회유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는 초조함이 들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회사에서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가뜩이나 승진이라는 제도가 없는 외국계 회사라 다른 직무에 지원하지 않으면 계속 같은 직책에 같은 월급을 받으니, 다른 동기부여가 없다면 일을 지속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경력이 쌓일수록 손도 빨라지고, 업무강도는 높아져만 가는데, 내게 여전히 느리다는 팀장님의 피드백.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원래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꼽만큼의 일할 마음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이 말 한마디는 속에 감추고 있던 ‘퇴사'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내놓으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그러면.. 저는 퇴사를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렇게 나는 사직서를 던지고 회사라는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니?”


   부모님께서 물으실 때마다 뚜렷하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농담하듯이 귀촌해서 자급자족하며 먹고 살 거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퇴사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모두 나열해봤다.


   ‘여행다니기, 사진찍기, 글쓰기, 주말농장, 채식 요리 수업, 흙집 짓기 수업 등등 이것만 해도 일단 1년은 즐겁게 보내겠지. 그러다가 정답이 안 나오면 다시 취직을 하면 되니까.’


   마침 집 근처에 있는 주말농장이 생각났다. 평소 관심 있던 농부장터 ‘마르쉐’에 참여하는 한 농부님이 가져오시는 형형색색의 채소들이 참 맛깔나보였다. 채식을 하다보니 요리를 하게 되고, 유기농 야채를 찾게 되니 자연스레 조금 더 건강한 채소를 파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다. 인스타그램에 태그된 농부님의 계정을 타고 들어가보니 고양시에 농장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주말농장을 일반인에게 분양해주고 있었다. 찾아보니 걸어서 15분거리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주말농장에 신청서를 냈다. 5평짜리 땅을 둘러보며 지레 겁을 주는 농장 대표님의 말을 흘려들으려 노력했다.


   “이거 작아보여도 막상 농사지으면 은근히 커요.”

   “비닐 멀칭 안 하는 게 원칙인데, 잡초 잡는 거, 꽤나 힘들걸요.”

   “거의 매일같이 와서 관리해야 해요.”


   내 먹을 거 내가 지어본다고 덜컥 분양해놓고 막상 바빠서 자주 오지도 못해 풀밭을 만들어버리는 젊은 도시 사람들의 패기를 많이 보셨나 보다. 나의 마음가짐은 다르다는 것을 은근히 어필했다.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었어요. 대표님의 농장에서 무비닐멀칭, 무화학비료, 무농약의 3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어요.”


   심지어 나는 회사에 다니던 1년 전에도 분양을 받아보려고 왔다가 비슷한 말을 듣고 겁을 먹고 포기했었던지라, 1년 간의 고민 끝에 다시 왔다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나의 첫 5평짜리 텃밭은 내 눈에 한없이 예뻐보였던 것 같다. 겨울 내내 생태텃밭과 퍼머컬쳐 관련 책을 읽으며 나의 작은 텃밭을 설계했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 가지, 애호박, 딸기, 감자는 무조건 심고, 몸에 좋다는 브로콜리도 심어야지. 고추, 대파, 배추는 기본이지. 허브류를 함께 심는 게 좋으니까 바질이랑 딜을 함께 심어볼까. 해충을 쫓고 익충을 불러온다는 꽃은 뭘 심을까. 메리골드는 예쁘니까 꼭 심고, 보리지, 원추리, 국화, 한련화도…’


   고작 다섯평짜리 텃밭에 심고 싶은 것은 벌써 수십 가지였다. 모든 작물의 심는 시기와 수확시기, 씨앗을 심을지 모종을 심을지를 계획하고, 어떻게 기르는지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수험생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더 좋은 대학을 가지 않았을까. 봄에 씨앗을 심으니 자라나는 새싹들이 기특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게 당연한데, 새싹이 콩껍질을 들고 머리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니 뭐가 그렇게 신기했는지 모르겠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콩 사진만 몇 장을 찍었다. 날씨도 풀리기 시작하니 아침마다 산책하듯이 가는 텃밭일이 참 재미있었다. 새로 나는 새싹이 잡초인지 내가 심은 작물인지 구별도 못하고 그냥 몽땅 기르고 있으니, 대표님이 가끔씩 지나다니면서 “이건 뽑아야 해.” 하며 하나씩 알려주셨다.


   30년만에 극심한 봄가뭄이 왔다며 농부들이 한숨을 쉰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틀만에 텃밭을 가면 노출된 흙이 쩍쩍 갈라져있다. 농사를 지으니 정말 기후위기가 피부로 와닿는구나. 하필 내가 농사를 시작한 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더욱이 생태농사와 자급자족의 삶을 망설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마다 피는 꽃들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잎채소들, 허브들을 찍어 SNS에 자랑하곤 했다. ‘나 퇴사 후에 이렇게 잘 살고있다~’고 떵떵거리듯이. 돌아서면 쑥쑥 자라있는 쌈채소를 한가득 따서 강된장과 비건 고기를 한 상 가득 차려 또 올렸다. 비건들도 이렇게 잘 먹고 산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뿐인가, 오븐야채꼬치와 버섯만두칼국수, 딜페스토파스타, 햇완두콩샐러드, 루꼴라피자 등등 내 밥상은 내가 키운 야채들로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보여주기 위한 포스팅은 아니었다. 농약, 화학비료 안 치고 지렁이들과 함께 직접 기른 내 작물들로 차려 먹는 집밥은 고급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사치, 그 자체였다. 이런 사치라면 한없이 부려도 좋을 것 같았다. 자연스레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고,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여유까지 생겼다. 친구들을 초대해 텃밭채소 비건 요리를 대접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효율성의 법칙 아래 굴러가는 도시의 삶에서 나는 점점 낡고 녹슬어가는 기계 부품이었다. 더 이상 낡아서 못 쓸 때가 되면 새 부품으로 교체되겠지 하는 생각에 암울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설계해놓은, 안정적이라고 하는 체계 안에서 낡은 부품들은 그저 그런 삶이 정답이라며 살고 있다. 나는 나를 갉아먹는 삶이 너무 이상했고, 그런 삶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만이 관심사인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맥이 빠졌다. 언젠간 교체될 부품에 불과한 미래가 없는 삶이 항상 불안했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살며 내 삶을 내가 꾸려나가는 주체적인 삶을 항상 꿈꿔왔다. 도시에서만 살았기에, 내가 먹을 음식 하나 기르는 법도 모르고, 내가 사는 집이 어떻게 지어지는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고 살았다. 나는 기후위기가 심해져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왔을 때 가장 먼저 나가떨어질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시작한 농사일은 내 삶을 나 스스로 꾸려나가는 힘을 가르쳐주는 감사한 일이 아닌가.


   처음엔 그저 비건, 제로웨이스트를 본격적으로 실천해보자 하며 시작한 농사일이지만, 내가 먹는 것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내가 입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내가 사는 집이 어떤 재료로 지어졌는지를 알고 더 나은 선택지로 바꾸는 것이 내 삶을 사랑하는 참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 같이 조금씩 바뀌어가면, 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삶이 아닐까. 이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나 자신을 소중히 하는 삶,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좋은 가치를 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생태농사에 점점 더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다. 생태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치유농장을 만들고 싶은 꿈도 생겼다. 풀을 메고 작물을 관리하며 품앗이를 하고, 텃밭에서 난 작물들로 요리한 채식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농사 부산물로 만든 생활재들을 판매하고, 흙집으로 예쁘게 지은 집에서 사는 커뮤니티는 행복할 수 있을까? 나의 실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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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흙집 게스트하우스 운영자, 채식식당 사장님 또는 생태농부가 되고 싶은 현실적 이상주의자(?).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도 얼마든지 현실로 만들 수 있다며 자신있게 외치고 다니지만

사실은 겁도 많고 붙임성도 없는 소심쟁이이다. ‘느리지만 꾸준하게’가 내 인생의 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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