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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연다는 것

나무 / 2023 소소기록 희망의숲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교차하는 시선들

   오랜 시간 열어보지 않았던 기억의 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전화기를 집어 들고 경찰을 부르는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깊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문을 열어본다. 경찰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몸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식기가 박살 나는 소리, 엄마가 약봉지를 입에 털어 넣는 소리도 들린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나는 첫 번째 문을 다시 닫는다. 경찰 아저씨가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어린 나의 속마음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두 번째 문을 열었다. “쿵-쿵-쿵!" 인터폰 화면 너머로 경찰의 모습이 보인다. 아빠가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뛰쳐나간다. 국화 냄새와 향냄새가 퍼지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눈이 탱탱 부은 엄마가 쓰러져 있다. 기억은 나를 다시 집으로 이동시켰다. 부엌에서 퍼져오는 빵 굽는 냄새에 코끝이 찡해온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만든 샌드위치 좀 오빠 일하는 곳으로 가져다줘라.” “귀찮아요. 동생보고 가라고 하면 안 돼요?”


   세 번째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열댓 명의 친구가 나의 책상 주변을 둘러싸고 서 있다. 누군가 호기심 있는 얼굴로 묻는다. “왜 전학 왔어?” “오빠가 죽은 동네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교실의 공기는 빠르게 무거워졌다. 친구들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겨 보이며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보는 친구들 앞에서 가족이 죽은 사실을 다짜고짜 얘기한 것을 후회하는 나의 얼굴이 보인다. ‘아, 14살의 나는 같이 울어줄 친구가 ‘많이’ 필요했구나.’


   네 번째 문을 열었다. 52번 버스 맨 뒤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내 옆자리에는 덥수룩한 머리에 손톱이 길고, 안경 쓴 남성이 앉아있다. 남성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 시작했다. 불편함을 내색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나는 내리는 척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곧 내려야 해서 다리를 조금만 비켜주세요.”라고 말하자, 그는 중저음의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넘어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정중히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다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재빨리 그의 다리를 넘어가는 순간, 나의 교복 치마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아, 씨발!”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욕설과 함께 버스 뒷문이 열렸다.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그 남자가 나를 제치고 먼저 내렸다. 나는 계단을 다시 올라갔고, 버스 문은 닫혔다. 눈물이 나오기도 전에 ‘살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52번 버스를 타기 싫어서 매일 야자를 쨌다.


   다섯 번째 문을 열었다. 공동 현관문 앞에 하의를 탈의한 중년의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서 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들어서고 있던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도망쳤다. 요동치는 심장을 움켜잡고 집에서 30m 떨어진 전봇대 뒤에 숨어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우리 집 바로 위층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고 온 경찰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공연음란죄 성립은 어려울 것 같아요. 말을 잘 못하고, 어딘가 조금 불편하신 분 같은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더군요. 일단은 두고 보시는 게… 혹시 모르니 자주 순찰 다니도록 할게요.” 나는 집 앞 전봇대 뒤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도망쳐야 했다.


   여섯 번째 문을 열자 실습실 안 조리대 위에 불투명한 물살이의 눈동자가 보인다. “서걱 서걱 서거걱” 친구들이 거침없이 물살이의 사체를 해체하고 있다. 오른손에 칼을 쥔 채 물살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얼굴이 삭제된 다른 동물의 신체 부위는 아무렇지 않게 다루던 내가 눈, 코, 입이 보이는 물살이의 비늘을 긁어내고, 내장을 제거하고, 아가미를 뜯어내는 행위는 두려워했다. 그러자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생선’ 손질도 못하는 애가 무슨 요리를 하겠다고.” 물살이를 향했던 그의 칼날이 내게 닿았다. 전공에 대한 열정을 죽인 날카로운 칼날. 나의 여섯 번째 문짝에는 크고 작은 칼집들이 나있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열어버린 기억의 문들. 어떤 문은 문을 열기도 전부터 고통스러웠고, 어떤 문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어떤 문은 다시 열어야만 했던 문이었다. 오랜 시간 열어보지 않았던 기억의 문들 안의 나는 상처와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 기억의 문들은 그 당시에 내가 받은 고통을 온전히 치유하지 못했던 문들이기도 하다. 혼자 삼켜야 했던 슬프고, 무섭고, 아팠던 기억들을 다시 꺼내어 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활자로 펼치며 기록한다는 것. 이제서야 나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생긴 것이 아닐까.


   또 다른 기억의 문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을 나에게 조심스럽게 열쇠를 건네며 말해본다. 기억의 문을 통해 내가 세상에 던져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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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다시 태어난다면 나무가 되고 싶은 인간.

모든 동물이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저항하고, 춤추며, 평화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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