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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에게, 산다는 건 여전히 재미 없네요

라이 / 2023 소소기록 희망의숲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교차하는 시선들

   그 누구보다도 내가 살기를 바랐던, 나를 살게 했던 나의 친구 제이에게. 닿지 못할 편지여도, 당신에게 나의 일상을 들려주려고 해요.


   나는 살아가고 있어요. 산다는 건 여전히 재미 없네요. 가장 재미없는 건 매일 출근한다는 사실이에요.


   전직, 이직을 밥 먹듯이 했던 저는 이제 한 직업을 가지고 한곳에 정착한 노동자로 살고 있어요. 그런데요. 노동이란 건 뭐랄까. 나 자신을 쥐어짜 믹서기에 갈아 넣어 생산하는 행위 같아요. 현재 나는 야근 수당 없이 야근을 자처해요. 일을 완벽히 해내고 싶고, 자본가의 눈치도 보고, 성과를 잘 내고 싶어서요. 그래서 나는 저녁이든 주말이든 나를 쥐어짜고 갈아 넣고 있어요. 이런 나를 문득 보면 아주 오래전, 내가 당신에게 했던 한 말을 떠올려요. “추가 수당, 야근 등 노동법을 위반하는 직장은 신고해야 하고, 절대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거요. 내 일터에서부터 노동법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게 있었던 때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노동법을 패대기쳤어요. 한심하죠?


   또 한 가지. 매일 출근하기에 앞서 투명한 벽 하나를 들고 다녀요. 대중교통 의자에 앉으면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의자에 앉으면 바로 투명한 벽 하나를 세워두고 안 보이는 척해요. 그러고 나서, 사무실에도 들고 가요. 하루에 가장 오랫동안 함께하는 사람들인 직장 동료, 상사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요. 이를 충실히 해내기 위해 벽 안에서 예민한 나의 시각과 청각을 최대한 무뎌지게 만들어요. 누군가에게서 전해져 오는 감정도, 감각도 외면하고요. 누군가의 표정, 말투에 대해 의미 부여하지 않으려고 해요. 누군가의 별거 아닌 숨소리에도 쉽게 흘려보내지 못할 때가 있으니깐요. 이런 노력은 저뿐만이 하는 건 아닐 거예요. 결국 같은 공간에서 서로가 감각과 감정을 애써 외면한 채, ‘좋게 좋게’ 평화를 일궈내는 셈이죠. 벽도 만들고, 주문을 외우고… 애쓰고 있네요.


   참 우스워요. 어느 순간, 나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자본가에게 선택받고, 자본가에게 버려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치는 여정이 됐어요. 잠시 이 여정에서 빠져나온다고 해도, 다시 선택받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겠죠. 모든 채용 사이트를 연 뒤, 회사 후기를 찾아보고, 한 줄의 스펙을 위해 살아온 날들을 최대한 펼쳐 기억을 더듬고요. 하지만 나를 대변할 수 있는 활동은 자본가가 원하지 않아서 최대한 나를 지우고, 검열하고, 포장하죠. 그뿐이겠어요. 면접 일정이 잡히면, 진정성이 우러나오는 대본도 구성하고, 화장까지 하고요. 하지만 이런 노력을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곳도 있죠. 차별적 발언, 5분도 안 돼서 끝나는 면접 자리 등. 그런데도 미소를 유지한 채, 면접관에게 ‘좋게 좋게’ 인사하고 나오죠. 또 정성을 들인 만큼 그곳이 다니기 좋으리란 법은 없고요. 그래서 나는 탈출하기도 바빴잖아요. 당연시되는 야근, 상사의 압박, 경직된 조직 등…. 부당한 때에도 부당하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나왔어요. 웃기죠?


   이젠 ‘다닐만한 곳’에 다니게 됐는데, 왜 이렇게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울까요? “다들 힘드니깐 버텨야지.”라는 말 대신, “다들 힘드니깐 바꾸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저 나는 “일하느라 정신없어서 신경을 못 썼다.”라는 말만 하고 있어요. 소수자에 대한 탄압, 사회의 이슈, 누군가의 분신 사망 소식에도 무뎌진 저를 느껴요. 그들이 잘 안 보여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요. 그래서 혼잣말만 해요. “큰일 났다. 자본과 권력이 원하는 게 ‘침묵’인데.”라고요. 그게 끝이에요. 그냥 입을 다물고 혼자 술을 마셔요.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 흡수되는 그때, 다시 그걸 토하는 행위. 어쩐지 그게 조금 재밌더라고요. 노동 외에 나를 갈아 넣어 생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구토네요.


   노동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지,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건지. 노동자라면 누구나 다 하는 흔한 고민이지만, 저는 유난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아요. 나의 일상은 평화로운데, 평화롭지 않아요. 무언가 재미난 일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졌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제이 대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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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궁금한 게 많습니다. 담배를 좋아합니다.

어쩌다 보니,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으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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