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나 / 2023 소소기록 희망의숲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교차하는 시선들
며칠 전 직업란에 표시를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주부’에 체크를 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둔 후, 지금까지 직업란에는 주부로 표시했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엄마의 직업란에는 무직이라고 적어서 보냈다.
국어사전에 활동가는 ‘어떤 일의 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힘쓰는 사람. 흔히 정치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을 이른다.’라고 나오고,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 정의한 바에 따르면 나는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업이 아닌 것이 맞고,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활동가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자신 있게 나를 활동가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지난해, 30여 년 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네가 그런 일을 할 줄 몰랐다!”
친구들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듣고 나서 말했다.
“나도 몰랐어! 내가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나는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 데모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데모하는 그들을 관심 있게 본 적이 없을 만큼 사회 문제에 무관심했다. 대학을 들어오기 이삼 년 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선배들은 목소리를 죽여가며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광주에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광주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보이는 적대감 때문에 내내 무서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내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지금은 폐지된 위수령을 전두환 정권 때 선포하려다가 취소한 일이 있었다. 친구들은 쉬쉬하며 그 일을 분노하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위수령이 뭔지 모르기도 했지만 분노하는 친구들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였다. 회사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선배였던 여직원이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강요받고 그만두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는 직장 내에서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받는 불평등한 일이 당연한 듯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직장에서는 직급이 없는 남자 직원의 호칭은 ‘선생님’이었고, 여직원들은 ‘미스’였다. 나 역시 누구에게나 ‘미스 문’으로 불렸고, 같은 직급의 남자 동료는 ‘선생님’으로 불러야 했다. 친한 동료가 여직원회 회장이어서 그 동료를 통해 호칭을 통일해 달라고 회장님께 건의를 했다. 회장님은 건의서를 읽고 나서 내게 차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한 뒤 고개도 들지 않고 말씀하셨다.
“미스 문! 나는 미스 문을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없어!”
그분은 얼마 후, 교육부 장관까지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아침에 사무실 책상을 닦는 일과 차를 타는 일은 당연히 여직원이 하는 일로 되어 있었다. 그 부분도 바꾸자고 여직원회를 통해서 요구했다. 대부분의 여직원은 그런 요구에 공감은 했으나 동참하지 않았고, 나는 교묘하게 남자 직원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나중에 남자 직원들이 나를 왕따시키자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 후, 딸을 낳았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은 아들을 낳기를 바랐다. 시집살이를 하면서 입덧으로 음식을 먹지 못하던 내게 시어머니 몰래 먹을 것을 사 줄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만약에 딸을 낳으면 이 음식값 다 내놓으라고 할 거야!”
나는 딸들이 내가 여자로서 겪은 억울한 일을 덜 겪으면서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세상을 알기 위해 신문을 더 열심히 읽었다.
나는 지역에서 동네 산 생태 보전 활동을 하는 풀뿌리 단체를 설립하고, 행정의 의지대로 관리되는 하천이 아니라 지역민들의 의견이 담긴 하천을 가꾸기 위해 지역단체와 소모임, 개인들이 모인 네트워크를 이끄는 활동을 하고 있다. 가끔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저는 딸이 둘 있습니다. 제 딸들을 잘 키우고 싶어 가졌던 관심이 이 일을 하게 만들었어요.”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내 딸들은 여자라서 겪는 불평등은 모르겠다며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나를 오히려 불편해할 때도 있다.
내 인생의 황금기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다 쏟았다. 활동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활동가였다. 어쩌다 보니 이 일을 하게 되었고, 닥친 일들을 해내느라 급급해서, 때로는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살았다. 활동을 마무리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이제야 뒤늦게 나는 어떤 활동가이고 싶었는지를 묻게 된다.
-
하바나
내 욕망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하루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단톡방이 지역의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네트워크로 발전해서
자발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유일한 버킷리스트는 전국의 전통 마을숲 기록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