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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사리 사랑을 말하지 않는 존엄한 것들

하리타 / 반려종의 시선 1장.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최근에 누군가 내게 “AI가 소설을 써서 출판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글을 웬만큼 잘 쓰는 것으로는 생존이 어렵다”며 작가라는 직업 외에 부업도 가지라고 했다. 나를 애정하는 사람이 사뭇 진지하게 한 말이고, 경제적 측면에선 틀리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나를 설득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슬프게 하기까지 했다.


   그는 사실 누구 못지않게 부지런히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근 20년 동안 수필을 꾸준히 써왔다. 심심풀이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와서도 사진을 곁들인 여행기를 남겼고, 영화나 책을 보고 나서도 아무도 청탁하지 않은 원고를 써서 어딘가에는 꼭 발표했다. 그런데 부지런한 수필가인 그가 ‘글쓰는 AI와 글쓰는 인간이 경쟁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서 나는 슬펐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닌데, 그는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애정하는 사람이 몸 바쳐 하는 일을 악의없이 비관해버렸고, 글쓰는 자신에게도 위기감을 줬다.


   AI가 쓴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글은 실은 인간이 쓴 글들의 재조합이다. AI는 딥 러닝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재처리해서 인간의 글 같은 형태로 출력해내지만, 그 과정을 따져보면 인간의 글쓰기와는 전혀 다르다. 인간이 지구라는 물질 세계에서 하나의 물질로 실존하면서 자기 몸으로 체험 -그 체험은 필연적으로 뇌 신경물질에 의한 전기 신호인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며, 비물질적이고 고유하다- 하는 것들을 언어로 표현해낸 것이 글이라고 정의한다면, AI는 엄밀히 말해 글쓰기를 하지 못한다. 글쓰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해서 글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낸다.


   AI는 하지 않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인간은 왜 하는가? 내가 아는 이 수필가말고도 부지런히 쓰는 인간들은 많다. 이들은 그저 기록 강박증을 가진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분명 글쓰기만이 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이를테면 두루뭉실했던 생각이 글쓰기를 거치며 명료해지고, 일상에서 문득 느끼는 강렬한 감정들은 글로 쓸 때 천천히 다시 느껴진다. 사회의 무수한 사건사고와 갑론을박에 대해 글쓰기로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어떤 갈증을 해소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의 말을 듣고 왜 슬픔을 느꼈는지 몇 주동안이나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쓰며 그 감정을 언어화하려고 애쓴 끝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정리되었다. 글쓰기는 상당히 본능적인 행위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 존재한다는 엄중한 사실을 확인받는다.


   이번 워크숍 <반려종의 시선-사랑과 돌봄>을 진행하면서도 글쓰기로 존엄을 실행하는 인간들을 여럿 만났다. 그 ‘존엄’들은 곁에 반려하는 다른 ‘존엄’들, 특히 비인간들을 부지런히 알아보고 불러내고 아껴주는 모습이었다. 이 인간들은 이스라엘 전쟁 반대 집회와 인스타그램의 쉐도우 배닝 사이에 끼어 으스러지는 심장을 의식하거나, 사무실에서 죽어가는 식물에 의식을 이입해보고 이내 미안해했다. 반려 존재들의 죽음과 부재를 겪으며 몸을 관통하는 그 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어이 그 속에서 의미와 의지를 길어올렸다. 길가에 버려진 비닐하우스나 단란함을 가장한 저녁식탁에서 선택을 했다. 익숙한 얼굴보다는 낯선 얼굴을 어렵게 들여다보기로, 그 곁에서 반려 존재로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이들이 덕분에 모임이 성사될 수 있었다.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 오만하게 존재하는 유아독존의 인간적 존엄이 아닌, 다양한 종들이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돕는 공생적 존엄을 역설하는 그런 글쓰기 모임.


   워크숍 타이틀로 내건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용어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반려종 선언>에서 빌려왔다. 이번에 그의 방대한 사상을 깊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두터운 지금(a thick now)’을 살면서 ‘괴상한 친족 공동체’인 ‘쏠루신(Chthulucene)’을 상상하고 또 실천해본 이야기들을 이 작품집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워크숍에서 배웠다. 반려는 거저 주어진 것들끼리 만드는 관계는 아니다. 완전한 타자로 멀찍이 떨어져 있다 만나게 된 낯설고 불편한 상대를 굳이 내 삶에 들여와, 돌보고 돌봄 받겠다 선택할 때부터 비로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 속에 들어가고 나면,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사랑을 내뿜고 또한 사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러나 쉽사리 사랑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랑일까, 계속 의심한다. 의심을 거두지 않는 그 자세가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었다.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어 기뻤다.


   다만 애통한 것은, 모든 반려종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통을 하고 흔적을 남기는 가운데, 글쓰기와 읽기는 인간끼리 통하는 소통법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 작품집이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 멀리 깊이 공명하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가 간절히 닿고 싶고 또 닿아 있는 비인간 존재들과의 공생(sympoeisis)과 사랑에 기여하는 일이길 바란다.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생명의 유전정보 속에 우리들의 접촉에 관한 어떤 분자적 기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상대방을 서로의 몸속에 만들어 낸다. 구체적인 차이에 있어서 서로에게 현저하게 타자인 우리들은 서로의 몸속에 사랑이라 불리는 짓궂은 발달성의 감염을 나타낸다. 이 사랑은 역사적인 일탈이고, 자연문화적인 유산이다.” <반려종 선언>, 도나 해러웨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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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타


<반려종의 시선> 글쓰기 워크숍 강사를 맡았다.

숨쉬기가 의외로 어렵듯 글쓰기도 그렇고, 숨을 쉬어야만 하듯 글도 써야만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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