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 / 반려종의 시선 1장.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집회에 가면 깃대도 있고, 피켓도 있고, 발언문도 있고, 구호도 있고,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있다. 사무실이든 동아리방이든 집이든 방이든, 온갖 곳에서 매고 온 깃대를 길게 펼쳐 높이 세우고 거기 기대어 서 있는 사람들. 마커와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종일 들고 다닐 한 마디를 택배 상자 뒤, 캔버스 위, 우드락 앞에 적어 온 사람들. 흔들리거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한국어나 다른 언어로 발언문을 외우거나 보고 읽는 사람들. 발언 맨 끝에 사람들이 선창한 구호를 따라 외치는 사람들. 사람들이 여기 있다. 그리고 종종 개도 있다. 종종 나도 거기 있듯이.
그리고 또 사람들이 있다. 나들이나 데이트를 나온 사람들. 그냥 길을 가는 사람들. 시청이나, 보신각이나, 광화문이나, 대사관 앞 말고 어딘가로 향해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도 분명 여기에 있는데, 그렇게 써 두기에 그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니까 여기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적는 편이 낫겠다. 여기 있었던 사람들과 여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 경찰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여기서, 깃대와 피켓과 주먹을 쥐고 쳐다본다. 자꾸 바깥으로 눈길이 간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여기 없다. 살려고 일을 하느라, 멀리 사느라, 장애와 사느라, 장애이든 아니든 아프면서 사느라,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죽어서, 산재와 참사와 재해와 전쟁으로 죽어서, 나로선 여기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50세 양회동 씨¹. 55세 방영환 씨². 37세 알리 파라칸트, 34세 리마무 게네고, 22세 최유진 씨³. 23세 박선빈 씨⁴. 인천시 미추홀구 빌라에서 살던 30대 남성 A 씨⁵, 그리고 석 달 새 네 번째로 돌아가신 인천시 미추홀구 아파트에서 살던 40대 남성 분⁶. 서울시 관악구 반지하 방에서 살던 가족 세 분⁷. 집 아닌 거리에서, 시설에서 살던 432 분⁸. 0세 라얀 압둘라 자카이라 알아스탈 씨부터 93세 마디야 압둘라 압둘 와합 할라와 씨까지⁹.
나는 모르는 채 그들이 여기 있다고 믿는다. 몸으로, 목소리로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대도 아주 분명히 여기 있다고 믿는다.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 없는 무엇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여기 없는 채 영혼으로만, 유령으로만 여기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여기 이 글에 미처 쓰지 못한 이름들도, 이름 아닌 숫자로만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함께. 그 사람들과 어쩌면 여기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했을지도 모르는, 아직은 여기 없는 제도(가령, 고친 노란봉투법과 사회복지사업법, 전세사기특별법과 마침내의 이태원참사진상규명특별법과 차별금지법)와 오지 않은 세계(가령, 평화롭고 평등한 세계)를 상상한다.
그런데 사실, 기억과 상상 속에 이렇게 있다 보면 나도 좀 없어지는 것 같다. 여기는 어디지? 여전히 이 땅이다. 태극기가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랑 펄럭이는 남한이다. 밤에는 별보다는 스타벅스 간판들이 더 잘 보이고, 새벽까지 건물들의 불빛과 트럭과 오토바이 헤드라이트가 켜져 있는 도시이다. 꽃 피는 4월에도 단풍 지는 10월에도 노란 리본과 보라 리본을 달고 끄집어내야 하는 슬픔이 있는 사회이다. 사회적 합의가 없다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듭 말하는 세계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라고, 이 정도가 지금 여기라는 말들이 믿음직스럽게 여겨지는 여기이다. 어쩌면 그게 정말인 걸까 싶다.
그렇다면 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구호의 박자를 놓친다. 일부러 어떤 구호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서 따라 외치지 않기로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 “Gaza, Gaza, don’t you cry, we’ll never let you down. (가자, 가자, 울지 마, 우리는 너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흘릴 눈물이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너무나 실망시켰기 때문에.
힘이 빠진다. 무력하다고 느낀다. 희망했던 것들이, 희망이라는 말조차도 아주 멀게 느껴진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려 했는데 상상할 수 없다고 여겼던 부정의들이 선수를 쳐버렸다.
집회 진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지구에서는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안내한다. 가자지구에서 들리는 공습경보처럼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5분간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진행하겠습니다.
마침 잘된 일이다. 가만히 도로 위에 눕는다. 떨어지고 밟힌 낙엽들 옆에 몸을 누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한숨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일어난다. 옷을 턴다. 마무리 성명문 낭독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박수를 친다. 고생했다. 집에 가자.
우리는 아직 이걸 할 수 있다.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다. 사이렌 소리는 진짜 공습경보가 아니었고 우리의 죽음은 다만 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헛것 같은 희망들도,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바람들도, 바로 거짓말 같기에 힘을 갖는 것 아닐까? 우리가 당장 살아 있다는 건 믿음의 영역으로 미룰 필요가 없다. 그러니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데 써볼 힘이 남는다.
여기 있던 누구들은 집에 잘 갔을까? 집회에 온 사람들, 경찰 일을 하러 온 사람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모두 말이다. 친구에게 조심히 들어가고, 집 도착하면 연락해, 하듯 물어보고 싶다. 친구가 연락하는 걸 잊지 않았다면, 쓰러져서 잠들지 않고 연락할 힘을 남겨 두었다면, 나는 잘 왔다고 답장을 하고 싶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고, 잘 자, 좋은 꿈 꿔, 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건 순진한 바람일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울먹이는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하마스를 규탄하냐고 묻는 사람들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람들의 죽음을 동시에,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만을 애도한다고, 모두 전쟁범죄라고,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고만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비정치적이라고,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포즈의 께름칙함과 다를 바 없는 모양일까?
왜냐하면 내가 집에 잘 왔다는 것도 순순한 일이 못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조금 걷고 계단을 올라와서, 화장실과 부엌과 전기가 있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지하철 차의 벽면에는 ‘여객열차에서의 금지 행위’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은 이렇게 말했다. 철도종사자의 허락 없이 기부를 부탁하거나, 물품을 판매 또는 배부하거나, 연설이나 권유를 해서 여객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여객 출입 금지 장소에 들어오거나 차량의 장치 또는 기구를 조작하지 말라고 한다. 흡연하지 말고,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복용하고 위해를 주는 행위를 하지 말고,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한다.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동식물과 안전조치 없이 동승하거나 휴대하지 말라고 하고, 전염의 우려가 있는 법정 감염병자는 열차에 승차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각 금지 행위에 대한 벌들을 설명했다. 50만 원 이하의 과태료부터 1천만 원 이하의 벌금, 그리고 2년 이하의 징역까지.
그런데 이런 안내를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 여기 당장 내가 있던 지하철 칸에는 아니더라도, 어딘가, 언젠가 있다. 만능 채칼을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 실종 전단지를 돌려야만 하는 사람들. 운전실에 들어가 봐야만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비상정지 버튼을 눌러야만 안전할 것 같은 사람들. 당장 담배를 피워야만 할 것 같은 사람들, 술을 마시고 약물을 복용했지만 집에는 가야 하는 사람들, 성적 수치심을 줘버린 사람들. 위험한 생물 또는 세균과 같이 사는데, 얘네들을 집에 두고 나올 수 없어서 같이 나와버린 사람들. 이 모두가 자유롭게 집에서 나오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지하철 역사 벽면에는 스티커 자국이 얼룩덜룩 남아 있고, 그것들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면서 남겨둔 흔적들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다만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이 일이 된다. 큰일이 되고, 투쟁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우리도 인간이라고, 시민이라고, ‘대중교통’의 대중이라고 말한다. 간단한 사실들이 선언이 되고, 요청이 된다.
나는 이번에는 과태료도, 벌금도 내지 않고,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의 제지도, 인터뷰 요청을 받지도 않고 타고 내렸다. 다음번에는? 그다음 번에는? 모를 일이다. 무사한 이번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일 뿐이다. 돌아갈 집이 내게 있고, 그곳에는 전기와 물이 잘 흐른다는 점이 그렇듯이. 그리고 이 점은 단순히 감사하고 말 게 아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내게 왜 가능한지, 이 가능함이 내게 요청하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한다. 기본적인 권리들이 이 세계에선 특권이기도 함을 인식하는 동시에 이들은 여전히 기본권이라고, 특권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나는 깨끗하고 따뜻한 물로 씻고 휴대폰 충전기를 꽂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상수도 배관과 전선망과 해저 케이블들이 끊기지 않아서, 수도와 전기와 인터넷 요금을 밀리지 않고 내서 그럴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들을 읽었다. 샤워를 언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간이 태양광 발전기에 의존해 전기를 쓴다고, 심카드조차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자주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라며 말을 시작하거나, 그게 소식의 전부다. 팔레스타인의 저널리스트 중 절반이 죽었다. 최악의 소식들조차 소식은 소식이기에, 그것이 살아 있는 누군가에 의해 전달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반하기에 좋은 소식이 되어버렸다.
나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오늘 내가 다녀온 팔레스타인 연대 및 이스라엘 규탄 집회의 사진을 올렸다. 그렇게 이것도 소식이 되었다. 역시 좋은 소식이기도, 나쁜 소식이기도 한 소식 말이다.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것, 여기 같이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소식이지만, 나쁜 소식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여기 모였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나쁜 소식이다.
좋음과 나쁨이 한 끗 차이이듯 내 집회 사진은 다른 사람들의 사진들과 한 스와이프 멀리 있다. 졸업 사진 촬영 사진(이스라엘 군대는 가자지구의 병원, 교회, 난민 캠프들에 공습을 하고 있다. 학교들에도 마찬가지다), 식당과 카페 사진(빵집에도 어김없이 폭탄이 떨어지고 있으며, 빵을 사러 나간 사이 집에 폭탄이 떨어져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 웃고 있는 사진(가자지구의 사람들은 죽은 가족의 몸을 들고 오열하고, 동료의 죽음 소식을 듣고 울먹이고, 죽은 반려동물을 건물 잔해 속에서 끌어내려 땅을 파고 있다)들. 내 친구들이 졸업을 하는구나. 맛있는 걸 먹었구나. 즐거운 하루를 보냈구나. 다행이다. 이건 좋은 소식이다. 진심이다. 이런 일상을 저기 누구에게도 빌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거니까. 하트를 눌러둔다.
몇 시간 뒤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자신의 도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집회에서 찍은 사진에도 하트를, 팔레스타인 뉴스 게시물을 공유한 것에 하트를 눌러두듯. 이건 꼭 같은 하트다. 메타가 팔레스타인 지지 게시물은 섀도우 배닝(shadow-banning)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신경 쓰지 않는 척 알고 브레이크(algo-break)를 가지면 된다. 건물 사진, 풍경 사진, 하늘 사진. 이 사진들도 중요하다. 한숨 돌리기.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 다시 하트를 누르기. 아직 심장은 뛰고 있다. 여전히 같은 심장이다.
인간의 심장은 주먹만 한 근육이다. 쉬지 않고 수축하고 이완하며 온몸에 혈액을 보내는 일을 한다. 인간 신체의 혈관은 지구를 세 바퀴 정도 빙 돌 만한 길이라고 한다.
심정지가 오고 숨을 쉬지 않는다면 심폐소생술을 받아야 한다. 심폐소생술은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그걸 할 수 없다. 다만 호흡을 불어넣고 흉부를 압박해서 산소가 있는 혈액을 뇌로 보내주는 일이다. 멈춰버린 심장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심폐소생술은 이렇게 한다. 하나,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 의식을 확인한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가슴과 배의 움직임을 보고 호흡을 확인한다. 둘, 주변 사람들을 지명해서 도움을 요청한다. 저기 흰 셔츠 입으신 분, 119에 신고해 주세요. 저기 까만 재킷 입으신 분, 자동심장충격기 가져와 주세요. 흉부를 압박하고, 서른 번 압박 후 고개를 젖히고 코를 막았다 열며 인공호흡을 한다. 이때 사람의 얼굴을 계속 살핀다. 혹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는지 봐야 하니까. 119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과 교대를 해가며 흉부 압박과 인공호흡을 반복한다.
괜찮냐고 묻기. 도와달라고 하기. 한 명씩 부르기. 얼굴을 살피기. 같이 하기. 계속 다시 하기.
여기엔 은유가 없다. 의미를 찾아낼 새 없이 최대한 빠르게 해내야 하는 일들이다. 절대로 전문가가 아니면서, 갈비뼈를 부러트린다 해도, 잘못에 대해 지는 책임이 두렵다고 해도, 다만 외롭지는 않도록 여기 같이 있기. 할 수 있는 게 없다 여기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거기까지는 해보기.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믿어보기.
그런데도 이 지침들이 누군가에게(가령,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그건 아마 그에게 마음이 있어서일 거다.
자꾸만 마음이 으스러진다. 꼭 그렇게 여기 있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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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불린 미역 한 그릇, 오트밀 세 컵, 두부 두 뭉텅이, 간장 쪼르륵,
소금과 후추 몇 숟갈을 넣고 충분히 끓여두면 소분해서 먹기 좋다.
김이랑 먹으면 더 맛있다.
1 윤기은 (2023.06.25.). ‘건폭몰이’에 특진경쟁 수단으로···200일 ‘건설현장 불법 특별단속’이 남긴 것. 경향신문.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6011653001
2 장현은 (2023.10.06.). ‘임금체불 1인 시위’ 분신 택시 노동자 열흘 만에 끝내 사망.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111110.html
3 구유나 (2023.10.25.). 이태원 참사 1년: 사는 곳·언어 달라도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 BBC코리아.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4nxy9kdlw4o
4 장현은 (2023.10.16.). SPC 빵 만들다 숨진 23살…“제 딸 박선빈, 기억해주세요”.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112188.html
5 박아론 (2023.03.02.). “7천만원 날려…더이상 못버텨” 미추홀 전세사기 피해 실직 30대 극단선택. 뉴스1. https://www.news1.kr/articles/?4969222
6 유서영 (2023.05.25.). 전세사기 피해자 또 숨져‥관리비 체납 ‘생활고’. MBC. https://imnews.imbc.com/replay/2023/nwtoday/article/6487146_36207.html
7 김영배 (2022.08.15.). ‘반지하 침수’ 20년 전과 지금이 너무 똑같다, 그게 더 무섭다. 한겨레21.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54755.html
8 복건우 (2022.12.13.). 홈리스 추모제 22년, 집 없이 살다 간 432명의 유언. 비마이너.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347
9 Mohammed Haddad, Mohammed Hussein and Konstantinos Antonopoulos (2023.11.01.). Know their names: The thousands of Palestinians killed in Israeli attacks on Gaza. Al Jazeera. https://www.aljazeera.com/news/longform/2023/11/1/know-their-names-palestinians-killed-in-israeli-attacks-on-ga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