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6.
나는 오늘도 실패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칭찬할 만한 '증오나 비통함 없이 두려워하지 않고 항의하거나 설교하지 않'는 글을 써내는 일이 오늘도 여전히,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실패의 필연을 직감함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누구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순간에 직면한다. 그런 우리는 으레 서로에게 '지켜주겠다'고 외치며 불안이라는 감정을 잠재우곤 했다. 그러나 6년 전, 우리는 304명의 삶들을 보내면서 그 언어들에 기의가 휘발되었음을 목격했다.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기호는 텅 비어 있음을. 그럼에도 자신있게 내뱉었던, 혹은 굳게 믿고 있었던 지난 날의 그 발화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혐오하였는지.
1.
절대 풀 수 없는 '끈'이 있다.
나의 노란 SNS 계정 프로필에는 절대 풀 수 없는 노란 리본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날짜'들은 기념의 의미로 그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각종 프로필들에 올려지고 내려지곤 한다. SNS식 추모이다. 내게는 그런 부지런함이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사진을 올리고 내리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 고단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일상에 떠밀려 가는 존재임에도, 쫓기는 시간에 늘 멱살 잡혀 끌려가는 비참한 생 속에 내던져졌을지라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잊어선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6주기를 맞이한 그날.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사건을 설명할 언어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내게는 언어가 부족했다. 매년 4월 16일은 내게 사유라는 것이 버겹게만 느껴지는 날이다. 그래서 언어 대신 이미지를 지키기로 했다. 내 삶을 나 또한 주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렵게만 느껴지기에, 매번 새로운 언어를 찾을 수 없기에, 매년 이미지를 기획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기에, 하나의 이미지를 위한 하나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애도가 '잊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마저도 망각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날을 어떻게든 되뇌어야 했다.
2.
버지니아 울프가 어림짐작으로 기대했던 100년 후의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90여 년 전과도 달라지지 않은 이 사회를 목도했기에, 6년 전과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하면 안 되는 것일까?
어른들이 만든 세계에서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아니,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임에도 외면했던 것일 테다.) 어른들이 교묘하게 파 놓은 웅덩이에 발을 헛디뎌 빠진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들이 만든 세계 규칙을 위반하지 않은 아이들, 어른들이 사는 방식을 답습하여 불행해진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외면한 채, 어른들은 '그러게. 다크웹에 왜 들어갔어?'라고 묻는다.
이수정 교수는 '우리집은 해당 사항 없으니까 괜찮겠지'라는 안일함 속에서 사회는 곪아버렸고, 결국 희생당한 것은 아이들뿐이라는 사실을 되짚어주었다. 그는 지난 20년 간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구조적으로 이 사건의 핵심을 설명한다. 2000년대 이후 거리에 내몰려진 수많은 아이들을 외면한 어른들, 성(性)을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럼으로써 거리에 내몰린 가장 취약한 아이들과 성매매를 목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들.
플랫폼은 외면한 채, 사회적 인식은 배제한 채, 더러운 설계들의 합, 그 총체인 함정 속으로 빠진 피해자들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파렴치한 사회.
3.
'국가는 국민을 구조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에, (국가가 정해놓은) 정연한 질서에 몸을 맡겼다. 그럼에도 구조 받지 못한 국민들이 있다. 삶들이 침몰해가는 그 순간이 생중계되었던, 그 사건을 잊을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목격자였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고 하여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스러지는 생애들을 목격했다. 목격한 것을 발화하는 일은, 피해자들을 위한 목격자의 최소한의 도리이다. 발화하지 않으면 잊힌다. 잊고 잊히면 다시 '없는 일'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희생자들 중 대다수가 학생이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국가와 사회가 정해 놓은 공적인 시공간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 말이다. 희생자들은 자신이 구조될 '차례'를 기다렸다. 이 사건은 그간 우리가 공공연하게 지켜온 질서의 존재 자체가 허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짚어주었다. 우리는 그간 무엇을 위해 질서를 지켰는가. 우리는 그간 무엇을 믿고 위정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는가.
나는 다치치 않았고, 우리 아이는 무사하고, 내가 본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 '우리 사회가 만든' 사고임에도, '우리'라는 범주화에 불평을 발화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목격자이자,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우리가 우리를 자성할 수 없는 한, 우리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위선이 된다.
몰랐다고, 혹은 잊고 싶다고, 벌써 잊었다는 언어는, '우리'를 절대 무결하게 만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