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본인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제 본 유튜브에서는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음’과 ‘이 세상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임’을 동시에 되뇌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20살을 지나 30살이 가까워질수록 내가 범인(凡人) 임을 인정해야 하는 일상만 이어질 뿐, 중요한 사람이라는 주문이 효과를 얻는 순간이 찰나일 때가 많다. 사람마다 본인의 찰나를 느끼는 순간은 다양하다. 자신만의 시간에 색을 입힐 수도 있고, 타인이 알아봐 주었을 때 아무개에서 벗어날 때도 있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는 자신의 차에 붕붕이라는 이름을 지음으로써 차에 애정을 표시한다. 사물에 애칭을 붙이는 행위는 모두가 소유한 공장형 상품에 특별성을 부여하여 자신만의 특별성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반복하는 평범 속에서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왼손잡이의 경우 찰나를 만들기에 유리한 면이 있다. 자신만의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시공간과 물건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식판, 급식실, 가위, 화장실 등을 통해 이야기를 쌓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상품은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왼손의 극복 이야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왼손잡이로서 가장 좋은 점은 사람에게도 서사를 쌓을 수 있는 점이다.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 밝히든 상대방이 알아봐 주든 한 번은 내가 왼손잡이임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때 그 사람과 나의 서사가 시작되어 나만의 의미부여가 시작된다. 하지만 왼손 고백 서사는 쌓일수록 일상성을 띄고 반복 속에서 평범성을 지니게 된다. 그럼에도 특별성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첫 만남에 나에게 왼손잡이냐고 물어봐주는 사람이다. 안녕하세요라는 통상적인 인사말 뒤에 따라오는 첫마디가 “지수 씨, 왼손잡이네요?”는 나를 설레게 하기 충분한 말이었다.
첫 회사의 첫 출근 날, 직속 과장님은 근로계약서 작성을 위해 나를 회의실로 부르셨다. 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류를 작성하는 나를 보시곤 과장님은 왼손잡이냐고 물으셨고 “우리 딸도 왼손잡인데, 왼손잡이로 지내면서 힘든 점 없어요?”라고 말을 이으셨다. “딸님 나이에는 가위질을 못하는 게 가장 속상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날 퇴근 후 친구에게 과장님에 대해 5분 넘게 이야기하였다.
낯가림이 많은 성격에 첫 만남을 두려워하는 내향인을 위한 완벽한 아이스브레이킹이지 않아? 보통 어색하면 mbti나 사생활을 물어보기 일쑤인데 말이야. 앞에 앉은 사람의 특별한 점을 잘 찾아 주는 사람 같아.
입사 몇 개월 후, 그 과장님은 사내에서 다른 사원의 변화(새 옷, 새 머리스타일)를 가장 뒤늦게 알아차리는 사람이라 팀원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장님은 다른 팀원에게 관심이 없다, 세심하지 못하다는 놀림에 늘 웃으셨지만, 나에게 그 사람은 가장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다. 수많은 공동체를 거쳤지만 지금껏 내 왼손잡이 사실을 첫 만남에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