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만에 쓰는 블로그
문체에 따라서 글쓰는 태도가 얼마나 달라질까 궁금해서 높임말로 작성해보았다.
갑자기 제주도에 꽃이 보러 가고싶어져서 충동적으로 티켓을 예매하고 말았습니다. 목요일까지 성실하게 근무를 하고 저녁 7시반 비행기를 김포에서 타고 8시반쯤 도착해서 9시에 스무스하고 여유롭게 제주시 숙소에 골인하는것을 계획했습니다. 첫번째로 잡은 숙소는 이름도 낭낭한 랑랑쉐어하우스! (후기를 써볼까 합니다. 요즘에 후기를 써보려는 습관을 들이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숙소의 본질 ★★★✩
센스 ★★
위치 ★★★★★
별점을 매겨보았습니다. 주인장이 기분이 언짢아질수도 있기 때문에 몇개가 만점인지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실은 제주시를 엄청 작게보고 이쪽에 숙소를 구해버렸는데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보니 비용이 꽤 나왔습니다. 공항이 시가지와 붙어있어서 전 이정도쯤은 4천원이면 갈 줄 알았습니다. 7천원이나 나올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이쪽 숙소를 구하진 않았을것입니다.
숙소의 본질부터 이야기하자면 괜찮습니다. 잠을 잘 잤으니까요. 그도 그럴것이 손님이 저 밖에 없었습니다. 그 넓은 공용공간을 저 혼자서 사용하니 뭔가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제주에서의 하룻밤이라서 여행자들끼리의 어색하면서도 낯선 대화들을 맥주와 함께 은근 기대했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루전날부터 목이 아프고 감기기운이 있어서 뜨거운 샤워를 하고 옷을 껴입고 전기장판을 아주 뜨겁게 하고 잤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살며시 틀어놓고 잘 수 있었습니다. 주인장의 별다른 센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본에 충실한 숙소였습니다. 대신 위치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데, 그 이유는 사라봉 때문입니다.
언덕의 본질 ★★★★✩
센스 ★★★★
위치 ★★★★✩
둘째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서 제주항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저는 물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냥 발이 저절로 그쪽을 향하게 되는데 그러다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꽃나무가 보여 걸어 올라갔습니다. 4월에 꽃이 피는 제주로 놀러오게 된다면 꼭 사라봉을 올라가보세요. 저는 제주항쪽에서 올라가서 충혼각 쪽으로 내려왔는데 다른 코스도 분명히 경치가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과 여유롭게 산책하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주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충혼각 쪽으로 내려오는 계단도 멋있었습니다. 지금보니까 이 길이 올레길 18코스네요. 그렇다면 반대편인 별도봉으로 향하는 나머지 18코스길도 분명히 멋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귀포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했고 배가 슬슬 고파져왔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만 내려와야 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정육점인지 식당인지 애매한 곳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당의 본질 ★★★★✩
센스 ★★★✩
위치 ★★★✩
현지인들이 많이 찾고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손님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식당에 대해 신뢰를 해도 좋다는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반대로 나이가 어린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핫한곳이겠지요) 흑돼지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기본에 충실한 맛이었습니다. 가족이 운영하는 듯 보였고 벽에는 손주들이 조부모를 그린 손그림이 걸려있어 흐뭇했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치고는 친절함은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아 참, 가격이 좀 비싼것도요.
몸이 약간 좋지 않아서 약을 사먹고 서귀포행 버스를 탔습니다. 성판악을 지나는 코스였는데 아무래도 한라산에 가깝게 지나기때문에 구불구불한 길이 많아서 어지러웠습니다. 이럴때는 도쿄여행때 하코네에서 훨씬 더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올랐던 버스경험이 생각납니다. 시내버스임에도 비용은 거의 만원에 가까웠지만 기사님의 안정된 운전과 승하차시에 차분히 기다려주는 자세는 너무나 감동적이었어요. 만원이 결코 아깝지 않았던 경험이었습니다. 의외로 서귀포는 금방 도착했습니다. 친구네집은 서귀포의 구도심이 아니라 2청사가 있는 신도심에 있었습니다. 바로 집으로 가버리면 뭔가 아쉬워서 일부러 서귀포 구도심의 가장 오른쪽에서 내려서 걸어가보기로 했습니다. 역시나 바닷가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뻥 뚫려있는 하늘과 바다냄새와 소리, 가로수도 어딘가 바다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날이 무척 좋아 기분도 상쾌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 날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어느곳보다 제주의 미세먼지가 최악이었던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길이 무척 맘에 들었으니까요. 그렇게 사라봉에 이어서 올레길을 또 만나게 됩니다.
그냥 해안길을 따라서 쭉 걸으려고 했었는데 지도를 보니 올레길6코스 표시가 있었습니다. 사라봉에서 올레길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한번 믿고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이상한 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진 않겠지요? 누군가가 고심 끝에 골랐을테고 국내외 여러 사람들이 이미 걸어갔던 길일테니까요. 서귀포의 첫인상은 매우 좋았습니다. 이중섭거리는 어딘가 인위적이고 상점도 아쉬운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평타 이상은 해줬습니다. 요즘엔 이상한곳이 하도 많아서 평타만 쳐줘도 잘해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귀포 상설시장에 잠깐 들러서 천혜향 4개를 샀습니다. 이제부터 좀 걸을텐데 목도 마를테고 허기가 질테니까요. 이건 경험으로 얻은 저만의 여행 스킬인데 갈증과 배고픔을 생과일 몇개로 간편하고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상큼한 맛이 기운을 더 불어넣어주기도 하고요. 일석 삼조네요.
서귀포 해양도립공원을 지나서 삼매봉에 올랐습니다. 산은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경사가 완만한 편의 올레길이고 울창한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빛과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좋아해서 기분좋게 걸었습니다. 이 길은 그다지 인기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중간중간 보이는 올레길 표시가 친구가 되어줬습니다. 그래, 잘 따라오고 있구나! 저 뿐만 아니라 올레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은 이 표시를 반가워 할 것 같았습니다.
카페의 본질 ★✩
센스 ★★★✩
위치 ★★★
올레길7코스를 따라 걷다보면 아주 작은 간판의 카페로 가는 샛길이 나옵니다. 너무 지치고 목이 말라서 잠시 쉬어가고 싶었는데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예쁜 카페를 보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카페 이름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검색해보니 나오질 않네요. 레몬에이드를 마시면서 일산에서 육아를 열심히 하고있는 누나와 통화를 했습니다. 여름이라면 에어컨 바람에 무척 행복해했겠지만 음료만으로도 피곤이 풀리는 딱 좋은 그런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카페의 본질에 낮은 점수를 준 이유는 너무나 불친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원 인테리어는 좋았습니다.
카페에서 나와서 조금더 걸으니 친구가 사는 혁신도시아파트가 저만치 보였습니다. 차도를 따라 걸으니 조금 싫었지만 오랜만에 만나게 될 친구를 떠올리며 힘을 냈습니다. 6개월전에 서울 근교의 삶을 정리하고 와이프와 같이 제주에 내려와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시골집을 떠올렸습니다. 시골스러운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고 감귤을 따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는데 이런 곳에 이렇게 세련되고 최신형 아파트단지를 보니까 또 그런대로 친구와 잘 어울렸습니다. 좁은 폭의 시골길을 계속 걸어왔는데 단지 근처에 오니까 차도도 넓고 인도도 넓었습니다. 주변에 상가도 없고 차만 쌩쌩 달리니 걸을 맛이 안났습니다. 최근 읽었던 유현준 건축가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디서 살 것인가>이 떠올랐습니다. 대형 아파트 단지를 작게 쪼개고 상가를 하나의 건물에 다 몰아넣지 말고 1층에 분산시키는 일, 단지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을 허무는 일이 왜 살기좋고 걷고 싶은 동네와 연관되는지 그 책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파트가 왜 별로냐는 질문에 그저 이웃간의 정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셋째날엔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친구와 같이 제주시를 놀러갔다가 예약한 숙소인 한림으로 갔습니다. 사실 여기 숙소도 아는 후배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제주에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고보니 이렇게 흩어져 있는 친구들을 방방곡곡 찾아다니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바로 예약해버렸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예쁜 게스트하우스를 멋지게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요. 서귀포 혁신적인 아파트에 사는 친구도 나름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날 저랑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이에 살면 이상하게 미루고 미뤄져서 나중엔 이사가기 전에서야 '아무래도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께 나와!' 멋적게 만남이 성사되는 일이 있습니다.
숙소의 본질 ★★★★✩
센스 ★★★★✩
위치 ★★★
우선 이름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을 가장 열심히 참여합니다. 이름이 기억에 남지않거나 발음하기에 어색하거나 뜻이 부족한 느낌이 들면 아무리 디자인을 잘하려고 해도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뭔가 새롭게 만드려면 이름은 반드시 잘 지어져야 합니다. 호랑이주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런 완성도가 느껴졌습니다. 과하게 멋부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겸손해서 흐릿하지도 않은 한번 들으면 절대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그런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촐한 마당과 연결된 마루,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 밤에는 곳곳에 설치된 적절한 조명이 제주의 밤을 완성해주었습니다. 게스트끼리의 도란도란 술자리가 있었고 아침엔 우유와 콘푸러스트, 계란후라이를 해먹었습니다.
호랑이주택에 일찍 짐을 갖다놓고 카메라만 들고 주변을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올레길은 아니었습니다.(앗, 올레길 14코스와 살짝 겹쳤네요!) 새로운 동네를 가면 가장 일상적인 곳을 탐험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동네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한림이라는 동네는 뭔가 정겨운 느낌이 들었고 한창 꽃 시즌이기 때문에 어딜가나 꽃구경을 할 수 있었거든요. 여행 첫 날 감기기운이 느껴졌던 몸은 어느새 괜찮아졌고 날씨도 따뜻하고 베낭도 없어서 동네 산책을 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수 없었습니다. 가볍게 한바퀴를 돌고 슬슬 식당을 찾아봤습니다. 처음에 찾은 곳은 한림항 바로 앞이었는데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두번째로 골랐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의 본질 ★★✩
센스 ★★★✩
위치 ★★★✩
주택가를 개조한 식당인데 호랑이주택처럼 간판이 멋스러웠습니다. 조명도 전구색이고 내부도 아늑해보여서 들어갔는데 바(bar)가 있어 혼자 밥을 먹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유럽/남미 여행을 떠올리며 맥주와 밥을 주문했습니다. 아보카도와 명란이 들어간 덮밥이었는데 인테리어나 맥주의 구성이나 메뉴로 봤을 때 주인장이 오키나와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 그대로 재현해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문화를 높게 평가하지만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 그대로 베껴낸 한국의 식당들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집니다. 록다미라는 이름이 인상적이었는데 한자를 보니 '초록색이 많은 맛'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주문한 덮밥에도 초록색이 있었으니 컨셉을 잘 잡은 이름이지만 어딘가 잘 안외워진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이야기를 해보니 '백록담'을 이름처럼 부르는 발음이라는 것을 듣고 참 좋은 이름이구나 하고 뒤늦게서야 또 작명센스에 감탄했습니다.
호랑이주택에서의 밤은 순조로울 줄 알았는데 같이 자는 20대 초반 청년이 코를 너무 심하게 고는 바람에 한시간이나 뒤척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제 어디서나 잠을 잘 자는 편입니다. 아주 예전에 대학 친구들과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 안에서 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이 멀미를 하고 심하게 고생을 할 때에도 저는 편하게 잤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방심한 탓이었는지, 너무 오랜만에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 바로 아래에서 자야해서인지 너무 잠이 안왔습니다. 잠에 들기 전, 그 청년이 저한테 아주 다정하게 경고를 하긴 했는데 저는 빈 말인줄로만 알았습니다. 하긴, 그 때 알았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겁니다. 그렇게 아주 힘든 밤을 보내고 다음날 저는 한림을 떠났습니다. 그 친구때문에 떠난건 절대 아니고 바닷길을 따라 걷고 싶어졌으니까요. 넷째날이 되었는데 저는 다섯째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라 아무래도 제주시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림에서 제주시까지 걸어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꽤 멀더군요. 제가 제주도를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림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제주버스도 서울에서 사용하던 교통카드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저는 몰랐습니다. 자연스럽게 제주에 도착해서
"아차, 버스를 타려면 현금이 있어야하지"
은행에 가서 아주 오랜만에 현금을 인출했습니다. 혹시 시장에라도 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버스를 탈 때 반드시 필요할거라 생각했었는데 버스 안 카드단말기가 어쩐지 서울 버스와 비슷하게 생겨서 찍어보니 되는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내가 제주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했었구나"
호랑이주택의 집사인 후배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남은 하루동안도 역시 꽃을 볼 예정이라고 하니까 애월고등학교를 추천해줬습니다. 고등학교? 등교길의 짧은 꽃길이 예상되었습니다. 인천 자유공원 근처 인성여자고등학교에도 꽃이 아주 예쁘게 피는데 주말이면 일반인들도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하곤 합니다. 후배가 추천해준 곳이 궁금하기도 했고 대충 거리를 재어보니 그곳부터 해안길을 걸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정류장에 내려보니 역시나 길지않은 등교길이었지만 오래된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가 풍성하여 과연 멋있는 꽃길이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멋짐을 전해 들었는지 아주머니들과 연인들, 어린이들이 놀러와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풍성한 꽃길을 나름 한산하게 구경할 수 있는것도 행운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울근교 같았으면 꽃이 부실했거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이런 한적함은 상상도 못했을테니까요.
애월고에서 나와 해안길로 향했습니다. 지도를 보니 이 곳 또한 올레길 16코스에 들어가있네요. 괜찮은 길은 죄다 올레길로 지정되어있나 봅니다. 날씨도 따뜻해서 외투를 벗고 반팔차림으로 트래킹을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날에는 이런 그늘없는 트래킹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숲을 좋아합니다만 이렇게 따뜻한 봄날이나 시원한 가을날엔 하늘을 최대한 많이 볼 수 있는 탁 트인 풍경을 좋아합니다. 특히나 이런 해안가는 한 쪽으로는 아무것도 시야에서 가리는게 없고 방향을 잡기가 쉬워서 특히 좋아합니다. (단, 넓은 폭의 도로에 빠르게 달리는 차가 많은 그런 길 말고요)
바다를 보며 신나게 걷다가 한시간쯤 되었을 때 잠시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눈 앞에 낯익은 거위로고가 보였습니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고 마셔봤을 구스아일랜드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요. 여기서 딱 한잔만 하고 쉬어가면 좋겠어서 들어갔는데 100미터쯤 갔을까요? 입구에 다다르니 간판이 강풍에 쓰러져있고 문이 굳게 잠겨져있었습니다. 무척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맥주 한잔을 마셨으면 대낮에 풍경을 즐기지도 못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함께 반쯤 취해서 남은 도보여행이 아마 힘들어졌을겁니다.
올레길 16코스는 애월 어디에서부터 해안가에서 육지쪽으로 접어드는데요. 저는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해안길을 따라 걸었는데 역시 올레길을 벗어나니 풍경이 별로더군요. 재미없고 감동이 없는 길이 이어지니 어딘가 불편해지고 힘이 들었습니다. 마침 배가 고플때라 다리도 좀 쉬게해줄 겸 식당을 검색하려는데 돈까스가 땡겼습니다. 떡볶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찾기 힘들고, 돈까스 좋아하지 않는 남자를 찾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적이 있는데 참 공감하는 말입니다. 허기질땐 돈까스만한게 없죠. 마침 리뷰가 괜찮아보이는 돈까스집을 30분거리에서 발견했습니다. 계속 재미없는 길이 이어졌지만 돈까스를 먹을 생각을 하니 그럭저럭 버틸만했습니다. 잠깐 편의점 같은 곳에서 커피음료로 같은것 하나 사서 담배를 하나 필까 생각했지만 이 식욕을 그대로 보존해서 최대한 맛있는 돈까스를 먹고 싶었습니다.
식당의 본질 ★★★✩
센스 ★★★
위치 ★★★
식당은 하귀리에 있었는데 장사를 안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으니까요.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고 한 커플이 주문하고 있었고 한산한 편이었습니다. 맥주와 돈까스를 주문했는데 맥주와 스프가 먼저 나왔습니다. 돈까스와 같이 나오는 스프,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느낌에 뭔가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윽고 돈까스가 나왔는데 마치 훌라후프처럼 링 모양이었습니다. 배가 고팠기도 했고 뭔가 도톰하고 풍성한 그런 돈까스를 상상했었는데 생각보다 날씬한 모습에 조금 아쉬웠습니다.
"어..링 모양이네요?"
서빙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께 신기한 듯 말을 건네니 그럼 이게 링이지 뭐겠냐는 표정을 지어주셨습니다. 메뉴판 사진을 자세히 보지 않았던 방금전의 순간을 잠시 후회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소세지를 자르듯 먹기에는 수월하긴 했습니다. 사진이 없어서 아쉽지만 가게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음식맛은 좋았습니다. 맥주는 330ml를 다 마시면 좀 취할 것 같아서 남겼습니다. 만약 여기를 갈 일이 생겼는데 배가 고프다면 반드시 메뉴 사진을 자세하게 보고 주문하세요!
숙소의 본질 ★★★
센스 ★★✩
위치 ★★✩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은 공항과 가까운 제주신도심으로 잡았습니다. 공항까지는 버스를 타도 되고 시간이 일러 잡히지 않는다면 택시를 타도 5천원이 나오지 않을만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3시쯤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있어 바깥에 적힌 연락처로 주인장에게 비밀번호를 물었습니다. (그렇게 주인장은 두번정도 통화를 하고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숙소는 깨끗했고 샤워실에 온수는 잘 나왔습니다만 작은 부분들이 아쉬웠습니다. 공용공간은 쉬기에는 애매한 구조였고 사용시간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일요일밤이라서 아무도 없어서 공용공간에서 누구와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일도 없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테지만요. 제가 숙소에 가면 유심히 보는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수건입니다. 넉넉하게 두툼한 수건 2장이 준비되어 있으면
"아! 이 주인장은 샤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하며 감탄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두께가 얇으면 정말 별거 아닌데 야박함이 전달됩니다. 예전에 도쿄여행을 갔을 때, 식당에서 따뜻하고 두툼한 물수건을 받아본 이후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식당에서 얇고 차가운 물수건만 받아보다가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난 뒤부터입니다. 진짜 별거 아니지만 받아본 사람은 별거 아니지 않아요. 정말입니다.
식당의 본질 ★★★★★
센스 ★★✩
위치 ★★
초저녁에 오름에 올랐다가 갑자기 내린 비를 홀딱 맞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 같은데 숙소 주변에는 딱히 갈만한 곳이 없어보였습니다. 꼭 밥일 필요는 없고 조명색의 인테리어를 좋아하는지라 제스피나 오름가는 버스 환승하다 우연히 발견한 스크류드라이버 햄버거집을 갈까 했는데 또 그냥 구수한 밥이 먹고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동네에서 찾기로 하고 30분쯤 헤메서 발견한 국밥집입니다. 일단 현지인이 엄청 많고 엄......청 시끄러웠습니다. 제가 대학다닐 때 술집에서 떠들다가 주의를 받은적이 한번 있는데 그 때 이정도로 떠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마지막 만찬이라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고 오히려 흥겨워보였습니다. 돼지국밥을 주문할까 하다가 모듬국밥을 주문했는데 국물이 무척 훌륭했습니다.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술(소주)을 마시는데 기분이 좀 묘하더군요. 부부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줌마가 서빙을 담당했는데 특히 아저씨가 친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음식도 너무 맛있어서 계산할 때 아줌마와 눈이 마주치게 되어
"여기 맛있네요"
라고 칭찬의 말을 건넸습니다. 보통 그런 말을 잘 안하는데 그 이유는 거의 대부분 반응이 시큰둥하기 때문입니다. 아줌마도 그 말을 듣고 저를 힐끔 보더니 시큰둥하게
"여기 화려하진 않지만 맛집이에요"
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냥 좀 웃어주면서 "맛있게 드셨나봐요" 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앞으로도 이런 말은 잘 안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한식당은 서비스가 항상 아쉽게 느껴집니다. 서비스라는게 김치 무제한 리필해줘야 잘하는게 아닌데말이죠. 하지만 여기 근처에 올 일이 있다면 반드시 추천하는 식당입니다. (서운함을 토로하다가 마지막에 급하게 추천하는 모습이 이상하네요)
이렇게 저의 갑작스러웠던 꽃구경 제주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월요일 아침 비행기로 돌아와 집에 짐을 놓고 바로 출근했습니다. 오랜만에 블로그를 쓰게 만들어준 제주여행이 진심으로 고맙고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은 가기전에는 망설여지지만 막상 가면 참 좋습니다. 마치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경험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해외여행은 혼자서 많이 해봤는데 제주도는 혼자서 처음이라 그런 점도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별것아닌 포스팅 봐주셔서 감사드리고, 제주여행을 생각하신다면 망설이지 말고 하루정도 휴가내고 주말 붙여서 다녀오세요! 혼자서도 올레길만 따라다니면 나름 괜찮은 여행이 될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