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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l 09. 2021

사랑은 거기 오래 남아서 그리움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내 빨래는 말라가고, 나는 추억에 젖어가는.

     비바람이 친다. 비는 쏟아지는데 빨래는 기어코 해야겠어서, 파란색 이케아 플라스틱 가방에 세탁물을 가득 채웠다. 우산을 써도 비바람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고. 왜 오늘따라 바지는 긴긴~ 바지를 입었는지. 왜 오늘따라 슬리퍼가 아닌 뮬을 신었는지. 24시 빨래방에 도착하니 바짓단과 뮬이 온통 빗물에 쩔어 있었다. 그 꼴을 하고도 빨래를 해야만 하는 나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 바지와 뮬도 결국 또 빨아야 할 텐데.


     바리바리 싸 온 세탁물들을 세탁기에 넣고, 비용을 지불하고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세탁 사십 분. ‘세탁이 되는 동안 집에 다녀올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도저히 비를 뚫고 왔다 갔다 할 자신이 없어서. 세탁이 끝나면 건조기도 돌려야 하니까. 내가 여기에 빨래하러 온 이유는 사실 건조기 때문이니까.




     세탁기가 빨래를 털썩털썩 떨어뜨리는 동안, 밖에서는 비가 투탁투닥 내리고 있다. 나는 하릴없이 멍하니 세탁기를 쳐다보다가, 바깥을 쳐다보다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린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우산  없이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아  때가 언제였지?’


     언제였지? 언제였더라. 평소에 조금 내리는 비는 그냥 잘 맞고 다니는 편인데, ‘흠뻑’이라는 단어가 툭 하고 걸려서 생각의 꼬리를 잡는다.




     생각났다. 이천 십이 년 칠월 구일의 ‘빠이’. 그날, 바로 거기였다. 치앙마이에서 미니버스로도 한참 굽이굽이 가야만 하는 그 산골. 빠이로 가는 날, 치앙마이는 맑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비가 내렸다. 잠시 들린 휴게소에서도 비가 많이 내렸고, 빠이에 도착했을 때도 비가 내렸다.


     숙소를 구하고, 저녁 먹으러 나갈 땐 비가 그쳐서 우산 없이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다 먹고 나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여름 나라 태국의 한여름은 이런가 보다 싶었다. 우산은 없었고, 숙소까지 거리는 십 분 정도? 조금 심란하긴 했는데, 그냥 내리는 비를 흠뻑 맞았었다. 쪼리 찍찍 끌면서. 그렇게 비를 맞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니 좋았었다. 그 기분을 왜 그동안 잊고 살았지? 싶을 정도로.  신나서 실실 쪼갰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비를 흠뻑 맞은 것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곳에 있는 내가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첫 해외여행이었으니까.


     일주일 정도 그곳에 머물면서, 그렇게까지 비를 맞은 날은 없었다. 맑은 날들도 많았고. 이제 와 생각해보면 동네가 내게 준 신고식 정도였던 것 같다. 몇 번이고 다시 가고 싶었던 동네. 그곳을 다녀와 이런 문장을 적어뒀었다. ‘사랑은 거기 오래 남아서 그리움을 만들어 낼 것이다.





 얼추 구 년이 지난,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할 수 없는 오늘. 24시 빨래방에 앉아서, 비와 우산과 추억을 되짚어본다. 몇 번이고 다시 가고 싶었지만, 그 여행 이후 단 한 번도 가지 못한 곳. 나를 맞이한 그날의 비. 마침 우산이 없던 나. 하나하나 되짚으며 떠올리니, 정말 더욱더 짙어진 그리움이 마음에 숨어있었다.


 건조가 끝났다. 다시 그리움과 비를 헤쳐 집으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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