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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mondo Oct 22. 2021

나의 두 번째 서울

이유

나의 이십 대를 보아 온 주변인들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서울로 오게 된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뭐 엄청나게 커다란 부자는 아니었지만 감사히도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던 나는 학창시절 기상캐스터라는 직업을 꿈꿨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운 좋게(결국은 운이 나빴던 일이었지만) 어느 공중파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을 했는데, 당시 나는 지방에서 교생 실습을 하고 있을 때였고 첫 촬영이 잡힌 날은 실습 중인 고등학교 체육대회 바로 다음날이었다. 


촬영 전 날. 회의를 위해 체육대회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 방송사 대표이자 pd인 분을 만났다. 회의는 두 시간 정도 이어졌는데, 그 시간 동안 PD는 촬영 콘티에 대한 이야기 보다 방송계의 어떤 매니저를 소개해주겠으니 함께 술자리를 가지자며 성공하려면 성상납도 해야 한다는 그런 조언들을 늘어 놓았다. 불편했지만 나만 안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저 ‘그렇구나’만 반복하며 자리를 마무리하고 다음날, 그는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이어진 촬영 내내 직접적으로 방송관계자와의 약속을 잡으려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촬영이 끝난 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틀 내내 체력적으로 무리한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겠다고 하자 정신력을 운운하며 계속해서 술을 강요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나는 이 모든 요구가 버거웠고, 소문으로만 듣던 방송계의 민낯이 실제이구나 생각하며 두려웠고 절망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들도 많겠지만 그때의 나는 모든 방송계가 이럴 것이라 일반화했다. 이런 걸 내가 용납할 수 있을까? 자문하자마자 끔찍하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회식이 끝나고 본가로 내려오는 길에 나는 바로 사직했고, 다신 방송계로 발 들이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기나긴 방황의 서막이 올랐다. 

교직이수를 했지만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꿈을 잃어버린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초조함에 못 이겨 이력서를 뿌려대며 회사를 전전했다. 서울로 올라와 들어간 첫 회사는 열정 페이를 운운하며 백만원 초반대의 급여로 아침 8시부터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는데, 덕분에 돈을 쓸 시간이 없긴 했지만 밥을 먹거나 새벽 귀가를 위해 택시를 타기에도 빠듯했고, 체력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몇 달 뒤 결국 회사를 관두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급하게 다른 직업을 구하고, 급하게 구한 직업이 좋을 리 만무했고, 다시 다른 직업을 알아보던 굴레.


내 욕심에 올라 온 서울이라 집에는 말하지 못한 채 생활은 계속해서 불안해졌다. 나는 이곳에서 집주인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대체 누굴 위해 일을 하고, 대체 나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모든 게 영원히 지속되면 어떡하지? 밀려드는 회의감의 반복 속에서 다음날이 오는 게 무서워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옥 입구에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릴진저.’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지옥에서 살았다. 

수면제를 처방 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도 잠에 들지 못할 만큼 악화된 나는 점점 탈진해 갔다. 그리고 4년 뒤, 결국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잠깐의 외국 생활 후 한국의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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