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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mondo Oct 24. 2021

나의 두 번째 서울

야근 기간

말로만 듣던 야근 기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약 3개월 동안 9시부터 9시까지 격주로 하루만 쉬며 일을 하는 살인적 스케줄. 처음 야근기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들었을 땐 수당을 받을 수 있으니 힘들어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 사람은 겪어보고 말해야 한다. 그때까지의 나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지.

이 기간에는 너무 바빠 내가 어떤 의식을 가진 행동을 할 수도 없고, 쉬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어떠한 사고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뜨면 씻고 출근해 일을 하고, 밥 먹는 시간에 밥 먹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자는 패턴의 무한 루프. 그래서 나의 삶은 3월 이후에나 다시 시작되는데, 그에 앞서 3개월의 야근 기간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한 달. 12시간 근무를 하다 보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해 새벽 잠을 줄이고 잠드는 시간을 미루면서 작업을 했다. 하지만 3주 정도가 지나자 급속도로 저하되는 체력. 호기로웠던 3주간의 시도 후 나는 좀비처럼 눈을 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눈 감으면서 그저 버티는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2월이 되고, 몸도 마음도 지치던 와중에 다가온 설. 설 연휴 첫날까지 일을 한 뒤 본가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시청역에서 내려 서울역으로 걸어가는 길. 아 역시 서울 생활은 이랬지… 생각하며 터벅터벅 걷는데 왼쪽에 덕수궁이 보였다. 화려한 조명을 감싸며 고요히 빛나고 있는 덕수궁과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별처럼 비춰주는 건물의 불빛들. 걸음을 늘어뜨리고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비로소 느껴지는 청량한 겨울의 밤공기. 그제서야 나는 내가 왜 서울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수많은 기회들과 다양한 놀거리들, 그리고 한강의 존재도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매력이지만, 이른 새벽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 바쁜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나는 더 열심히 살고 싶다는 마음과 일종의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고,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품을 수 있었던 희망과 기대는 내가 서울에서 지불해야 하는 고통과 등가를 이루었다. 즉, 서울에서의 고통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고통이었으므로 내 불행은 상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다시 올라온 뒤 처음으로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래서 서울에서 살지!” 를 외치면서 기분 좋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남은 야근을 가뿐히 보낼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생각이란 얼마나 앞서 나가는 존재였던가.

설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은 야근 기간 내내 어떻게  회사를 그만둘까 혼자 수도 없이 계획을 세우고 상상했다.  버텨냈다기 보다는 그저 시간을 흘려 보낸 마지막  달이 지나고, 어찌 됐든 나는 살아 남았다. 모종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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