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에 겪었던 겨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당시 나는 미신이라고 웃어넘기던 삼재와 아홉수를 톡톡히 경험하고 있었다. 벌써 나의 이십 대가 끝나간 다는 것도 서러운데 이 정도면 세상이 나를 상대로 못된 몰래카메라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날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삶과 일의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였고, 말로만 듣던 번아웃을 매일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버티며 살았다. 잠드는 시간도, 밥 먹는 시간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책이나 영화를 볼 여유도 없었다. 몸과 마음 모두가 그저 정신없이 바쁘고 춥기만 했던 날들이었다. 정말 그런 폭풍 같던 날들 속에서 겨울 휴가를 받았다. 외국계였던 클라이언트들이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아 모두 휴가를 떠나 준 덕분에 내가 다니던 회사도 모두에게 짧은 휴가를 주었다.
휴가를 떠날 곳으로 처음 떠올린 곳은 시애틀이었다. 시애틀은 내 인생에서 가장 걱정 없고, 또 행복함이 충만했던 시절을 보낸 곳이다. 마음이 지치면 반짝이던 그 날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일할 때도 힘듦과 외로움이 참기 힘든 정도에 다다르면 시애틀에 갔다. 가서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두 번째 가족을 만나고 그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좋아하는 빗소리를 원 없이 들었고 맛있는 커피도 잔뜩 마셨다. 그러다 보면 마음을 다잡고 살아갈 힘이 생겼다. 이번 겨울 휴가에서도 시애틀을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동시에 이십 대의 마지막 며칠은 온전히 혼자이고 싶었다. 유난히 마음이 시끄럽고 힘들었던 스물아홉은 조용히 혼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포틀랜드가 떠올랐다. 포틀랜드는 시애틀에서 매우 가깝고, 시애틀만큼이나 맛있는 커피와 내가 좋아하는 보슬비가 있는 곳이었다. 힙한 도시라는 것과 맛있는 레스토랑이 많다는 말도 많이 들었던 도시라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목적지를 정했다.
휴가가 시작되고 시애틀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포틀랜드로 넘어왔다. 미국에는 대다수의 도시를 갈 수 있는 암트랙이라는 기차가 있는데, 시애틀에서 포틀랜드까지는 세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창가에 앉아 보는 길은 평화로웠다. 보슬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비가 많은 지역이라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많았다. 빗소리와 초록을 누리며 소도시의 마을을 지나는 것도 기차가 주는 하나의 재미였다. 각각의 마을이 뽐내듯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너무 귀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이지만 미국에서는 완전한 가족의 날이다. 그래서인지 기차에는 가족 단위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역에 도착하면 마중 나온 사람들과 도착한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사는 게 너무 바빠 다른 사람의 표정은커녕,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곳에서의 나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그들의 행복을 흡수하고 있었다. 여유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는 사이 나는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포틀랜드에 도착해서는 바로 숙소로 향했다.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호텔 문 앞에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만약 네가 언제나 평범함을 추구한다면, 너는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절대 알지 못할 거야'라는 문장이었다. 보자마자 포틀랜드에서의 며칠이 재밌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면서 호텔 앞에 있던 누군가가 "You look so happy! Welcome to Portland!"라고 말했다.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호텔에 들어가는데, 거울에 비친 나는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이 고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본 건 정말 오래전이었다. 다시 한번 포틀랜드에서의 시간이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