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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집에서 얼마 가지 않아 갈림길에 다다랐다. 두 갈래로 뻗은 골목에서 나리는 왼쪽 길을 선택했다. 나는 갸우뚱했다. 집은 오른쪽 골목을 따라가야만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냐는 내 물음에, 나리는 당산이라고 대답했다.
“당산?”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나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에 있는 자그마한 뒷산을 가리켜 우리는 당산이라고 불렀다.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고 하여 신성시하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언덕.’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 그대로 당산은 신성한 곳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몇 년 전에 당산에서 유적이 발굴되었다. 원래도 당산에는 군데군데 조개껍데기가 파묻혀 있는 구릉지가 있었는데, 그곳이 알고 보니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패총이었던 것이다. 패총이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덤처럼 쌓여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인데, 그 말인즉슨 당산 주위에 매우 큰 촌락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와 내 친구들은 당산에서 바로 그 조개껍데기들을 서로에게 던지고 놀았었기 때문이다. 놀이터가 변변치 않았던 당시 우리 동네에서 당산은 어린아이들에게 놀이터의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뒷산이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임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아저씨들이 당산을 찾아오더니, 산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의논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더 많은 아저씨들이 와서는, 기중기와 삽을 가지고 땅을 막 파기 시작했다. 등산로 주변에 천막이 세워지고 산의 곳곳에는 방책이 세워졌다. 우리는 그렇게 당산을 잃어버렸다.
이는 실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당산은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 그 이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쑥이 참 많이 자랐는데, 초봄이 되면 많은 아주머니들께서 갓 자란 쑥을 캐러 당산에 오르곤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가끔 산에 들러 쑥을 캐오곤 하셨는데, 그걸로 무침도 해 먹고 국도 해 먹곤 했다. 참 맛있었다. 하지만 발굴 작업이 시작된 후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당산을 들락날락한 데다가, 몇몇 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출입이 제한되어 쑥을 캐기 쉽지 않은 환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어머니께서 시내 오일장에서 쑥을 직접 사 오셔서 요리를 해 주시곤 하셨는데, 오일장 표 쑥국 또한 맛이 꽤 괜찮았다. 하지만 당산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잔뜩 심술이 난 상태의 나는 예전 쑥 요리가 더 맛있었다는 둥, 쑥이 맛이 없어졌다는 둥, 괜히 식사시간에 투정을 부리곤 했고, 그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많은 꾸중을 들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괜히 당산에 가려는 친구들을 가지 못하게 막는다거나, 시내를 갈 때도 당산을 질러가면 훨씬 가까울 수 있는 길을 괜히 빙 돌아간다거나 하기도 했다.
나도 그때 했던 행동들이 매우 어리숙한 짓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를 위해 변명을 해 보자면, 그 모든 것은 친구처럼 존재하던 공간을 빼앗겨 버린 꼬마 아이가 상실감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발굴작업이 시작된 이후로 당산에 올라갔을 때, 나의 눈동자에 비친 당산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는 매우 달랐고,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마다 나는 마음속 한구석이 이유 없이 아려오는 기분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당산을 가본 지 꽤 오래되었다는 내 고백을 듣고는, 나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전에는 자주 갔었다는 사실과, 원래 당산을 꽤 좋아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나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산의 산길은 총 4개 정도가 있었는데, 각각의 길마다 특징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근처에서 시작되는 길은 등산로가 매우 완만하고 산책하기가 좋아서 예전부터 어르신들이 자주 밤 산책을 하시곤 했다. 반면 쑥을 따러 가는 길은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 길이 구불구불해서 사람들이 잘 왕래하지 않았다. 학교 근처의 등산로로 말하자면 초입에는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나, 갈수록 기울기가 커져서 가장 힘든 등산로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조개 패총과 가장 가까운 길이 바로 학교 등산로였다.
주택가를 지나, 보육원과 중국집을 지났다. 노루표페인트와 갓 만들어진 새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인테리어 가게와, 가게 이름을 금빛으로 장식한 목욕탕 사이로 조그마한 샛길이 보였다. 이곳이 등산로의 시작점이었다. 내 기억과는 달리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등산로의 초입에는 콘크리트가 깔렸고, 조금 가파른 곳에는 손잡이와 계단이 생겼다. 유적개발 사업과 함께 당산의 부대시설도 함께 정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유적지로 지정된 공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근처에는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나와 나리는 잠시 멈춰서 글을 읽었다.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이 이루어진 유적인 OO 패총은….’
초등학생이 읽기엔 글이 참 길고 어려웠다. 우리는 계속 걷기로 했다.
우리는 등산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친구들이랑 무엇을 하는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불량식품은 어떤 것인지, 그때는 왜 그렇게 싸웠는지. 그때는 그래서 그랬어. 그때는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 담담하게 말하고, 상대도 고개 끄덕인 후 자신의 기분을 말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늘 투닥거리기만 했던 두 명이 새로운 환경과 함께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교류하게 된 것이다.
조잘대며 산을 오르니,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금세 산의 중턱에 도착했다. 그곳은 엉망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접근금지 표시가 보였고, 그 안에는 안전모를 쓴 아저씨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른 잡초가 무성하던 그곳은 공사 장비와 구덩이로 뒤덮여 있었다. 땅은 여기저기 사각 모양으로 파헤쳐져 있었고, 그곳에 원래 자리 잡고 있던 흙은 다른 곳에서 조그만 언덕이 되어 있었다.
“어서 지나가자.”
나리가 속삭였다. 나는 나리의 손에 이끌려 그곳을 지나쳤다.
“괜찮아?”
공사현장을 벗어난 뒤, 나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응, 괜찮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나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상에 도착하면 괜찮을 거야. 거기는 그대로거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기분이 나아졌다.